감성 가득한 연출로 모든 이들의 연애 세포를 자극했던 <72시간 소개팅>. 이 프로그램이 특별했던 건, 다섯 출연자 모두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관계는 어떤 태도로 상대를 대하고, 내가 어떻게 그 자리에 존재하느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들은 보여주었다.
<72시간 소개팅> 다섯 명의 여성 출연자들은 어떻게 상대를 끌어들이고, 함께 시간을 즐겼을까? 연애에서 정해진 공식이란 없지만, 이들이 보여준 태도만큼은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 연애의 매력은 단순히 외모나 말 한마디에 달린 게 아니라, 관계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려있으니까.
* 이 글에는 <72시간 소개팅>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같이 있을 때 재밌는 사람
Ep 1. 현구와 미소
미소와의 데이트 뒤, 현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재밌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더 재밌고 싶고, 미소의 말도 재미있다고. 미소의 농담이 특별히 화려했던 건 아니다. 대신 둘 사이에는 계속해서 웃고 장난칠 수 있는 타이밍이 생겼다. 누가 관계를 이끌었다고 말할 만한 장면도 없다. 함께 놀고, 즐기고, 웃으며 시간을 채웠을 뿐이다.

미소와 현구는 좋아하는 게 많이 겹친다. 패션 브랜드, 음악, 애니메이션, 여행 스타일까지. 진격의 거인 박물관에서 콘셉트 가득한 사진을 찍고, 가챠를 돌리다 엉뚱한 데 돈을 써도 그 또한 웃음이 됐다. 취향을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나도 그거 좋아해요”라는 한마디면 충분하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이어 붙여간다.
둘은 유독 편안해 보였다. 서로 좋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통하는 지점이 생기면 그 위에서 함께 놀았다. 기차 안에서 도시락 먹는 것, 이어폰을 나눠 끼고 음악을 듣는 것. 일상 속 사소한 장면이 특별한 추억이 됐다.

하루를 정리하며 현구는 말한다. “미소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가식 없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까” 이 사람이라서 편해졌다는 뜻이다. 파르페를 기다리며 물수건으로 꽃을 만들고, 입술 모양 고로케에 함께 웃는 순간들. 별거 아니게 지나갔을 장면들이, 미소와 함께였기에 재밌는 놀이가 된다.
미소의 매력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더 또렷해진다. 서로의 세계를 이어가며 더 많이 웃고 놀았던 미소와 현구. 연애에서 중요한 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보다 얼마나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느냐 일지도 모른다. 미소는 그 사실을 무겁지 않게, 하지만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의 세계로 초대할게
Ep 2. 범중과 수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범중은 수민을 두고 “에너지가 좋다”고 말했다. 방콕의 자유롭고 복잡한 공기 속에서 그 말은 꽤 정확해 보였다. 낯선 도시,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도 수민은 자연스러웠다. 활발함과 여유가 동시에 느껴졌던 건, 처음 와본 여행지에서도 자기 리듬을 잃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수민은 여행하면 그 도시의 재즈바를 찾는다고 했다. 자신을 소개하는 플래너에도 음악과 전시, 새로운 공간에 대한 취향을 아낌없이 적어두었다. 수민에게 여행은 잘 짜인 일정이 아니라, 지금 이 도시를 가장 자신답게 통과하는 방법에 가까워 보였다.
다음 날 일정은 수민의 리드로 흘러간다. 아침 요가, 식사, 쇼핑까지 하루가 매끄럽게 이어졌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수민의 말은, 상대가 고민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배려였다. 흥미로운 건, 분명 수민이 방향을 제시했지만 그 앞엔 항상 범중이 서 있었다는 점. 수민은 따라오라는 요구 대신, ‘같이 해볼래?’ 하며 제안하고 있었다.
그렇게 범중은 태국에서 처음으로 똠양꿍을 먹고, 룸피니 공원에서 요가를 하며, 수민에게 옷을 선물 받는다. 수민은 자기 세계 안으로 범중을 초대했지만, 그 세계를 앞세워 상대를 압도하지는 않았다. 범중은 방콕을 구경하기보다, 수민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도시를 경험하고 있었다.

수민이 말하는 사랑은 ‘러브 앤 서포트’. 모든 걸 이룬 뒤 누군가를 선택하기보다, 자신의 과정을 함께 통과해 온 사람과 삶을 나누고 싶다고 말한다. 그 말에는 수민이 그동안 충분히 자기 세계를 살아낸 사람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다.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일로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온 사람의 여유. 주는 것에 익숙한 태도 역시, 스스로가 받은 지지와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 보였다.
수민과 함께한 여행이 인상 깊었던 건 특별한 이벤트가 많아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의 밀도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매력적인 사람은 상대를 바꾸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세계를 열어두고 함께 걸어보자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아닐까? 수민은 그렇게 자신의 세계로 범중을 초대했다.
관계를 섬세하게 다루는 사람
Ep 3. 상열과 채원
채원과 함께 있는 동안 상열은 배려받는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긴장해서 쭈뼛대는 상열을 보며 채원은 속으로 마음을 정한다. ‘내가 낯가리면 안 되겠다’라고. 상열이 길을 헷갈려 멈칫하는 순간에는 “버퍼링 걸렸다”며 웃음으로 분위기를 푼다. 상대의 긴장을 먼저 알아채고, 그 긴장이 관계를 굳게 하지 않도록 가볍게 걷어내는 방식이다.

채원의 배려는 작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여행 첫날 그는 책을 선물한다. 여행 중에 읽으려고 골랐다고, 상대방 것도 같이 챙긴다.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취향일지 완전히 알지 못하면서도, 같이 있는 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한 선택이다. 다음 날 아침에는 일찍 나와 차 안에서 먹을 간식을 챙긴다. 하루 종일 운전하는 상열을 생각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채원의 행동은 과해 보이지 않는다.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 오래 운전하는 사람이 있어서. 친절은 함께 있는 시간에 대한 책임감에 가까웠고, 이유가 분명한 배려는 부담되지 않았다. 채원이 관계를 섬세하게 다룬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래서일까? 채원은 연애를 오래 본다. 그의 마음이 생기는 데 걸리는 시간은 1~2년. 채원은 사람을 다 겪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좋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채원의 신중함은 거리 두기가 아닌, 존중의 또 다른 이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건 경계심이 아니라, 관계를 가볍게 시작하지 않기 위해서다. 한 번 연애를 시작하면 체력도, 감정도 아낌없이 쏟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은 늘 신중하다.

여행의 마지막, 상열이 마음을 표현했을 때 채원은 말을 아낀다. 대답할 수 없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짧은 시간 안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이 오히려 자신을 겁나게 했고, 좋은 사람 앞에서 자신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채원은 선택하지 않는다. 그 선택은 거절이라기보다, 관계를 섬세하게 다루는 일관된 모습과도 같았다.
후회가 남더라도 그 후회는 혼자 감당하겠다는 사람. 채원은 관계를 시작하는 순간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었고, 그 무게를 상대에게 떠넘기지 않기로 한다. 연애를 시작하면 최선을 다하고, 사소한 순간까지도 의미 있게 보내려 하기에. 채원의 신중함은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함부로 시작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자기 삶의 해상도를 높여온 사람
Ep 4. 현웅과 영서
영서의 삶에는 분명한 취향의 결이 있다. 여행할 땐 책과 이어폰을 꼭 챙기고, 길에서 본 장면과 들은 말을 옮겨 적는 노트를 따로 둔다. 사소한 선택의 순간에도 그는 늘 자기 감각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낯선 도시 삿포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고, 발길 닿는 대로. 사람들이 다 가는 곳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가리키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여행하는 동안 한국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말도 이와 연관된다. 영서의 여행 방식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꾸준히 탐색한 흔적이 담겨 있다.

영서는 연기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며 역사 이야기를 꺼낸다. 역사 공부를 좋아했는데, 연기 또한 한 사람이 쌓아온 시간과 선택의 맥락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역사와 닮아 있다는 것. 영서는 “나는 왜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왔고, 그 대답을 자기만의 언어로 차분히 정리한 듯했다.
자기 세계만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영서는 자기 삶을 성실하게 바라봐온 사람이라서, 타인의 이야기도 깊이 듣는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타인의 존재도 수용하기 때문이다. 영서는 현웅이 어떤 선택을 해왔고, 어떤 맥락 속에서 지금의 사람이 되었는지를 궁금해한다. 자기가 단단한 사람은 타인의 이야기도 흔들림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영서는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영서와 지내며 “내 모습에 가식이 없었다”라는 현웅의 말이 이 모든 걸 설명 한다. 현웅은 자기 자신이 된 거다. 영서가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한 건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 존재했고, 그래서 상대도 자연스럽게 자신으로 돌아왔을 뿐. 영서와 함께 있는 동안 현웅은 더 솔직해지고, 자기 중심을 다시 떠올렸다. 감정은 자연스럽게 깊어졌다.
이는 연애에서 가장 강력한 매력이 된다. 상대를 바꾸는 게 아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힘. 관계에서 매력적인 사람은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더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자기 삶을 충분히 살아낸 사람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음 놓고 웃을 수 있게
Ep 5. 세준과 세진
세진과 함께 있으면 시간은 금세 흘러간다. 처음 만나자마자 대뜸 슈크림 빵을 건네고, 일본어를 맞혀보라며 분위기를 툭 던진다. 만화 좋아하는 오타쿠 취향도 숨기지 않는다. 왠지 소개팅의 정석과는 거리가 먼 대화들. 아니나 다를까, 이 여자 ENFP 투머치토커 테토녀다. 두 사람의 여행은 걱정 없다.

세진의 말은 빠르고 장난은 과감하다. 처음 본 세준에게 “왕자님 같아요”라고 던지고, 느끼해질 수 있는 플러팅에는 바로 받아친다. 두 사람은 하루 종일 투닥거린다. 이상한 사람 둘이 개그 배틀 뜨는 거 아니야? 싶지만, 둘은 분명 처음 만난 사이. 어색함을 웃음으로 덮으려는 것 같지는 않다. 세진의 농담은 가볍지만 불안하지 않고, 눈치를 보거나 상대를 떠보는 기색은 더더욱 없다.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하지 않고, 상대의 반응을 재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세진은 자기 자신을 먼저 내놓는다. 오타쿠 취향을 숨기지 않고,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당당히 꺼낸다. 웃기려고 애쓴 게 아니라, 그냥 자기 방식대로 말할 뿐이다. 그러자 집안에 누워 애니메이션만 보는 세준도 자연스레 자신을 드러낸다. 어느새 동지애가 생겼다는 두 사람의 말이 이 장면을 정확히 설명한다.

무더운 대만의 날씨 속에서도 둘은 쉽게 지치지 않는다. 아쿠아리움에서 물고기를 보며 엉뚱한 비유를 던지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땀에 젖은 시간을 웃음으로 통과한다. 세진의 꾸미지 않은 말, 체면 차리지 않은 농담, 조금은 제정신 아닌 순간들. 그 덕분에 관계는 더 편해진다. “이 남자 신경 쓰인다. 지금 차은우 같아요. 육스 흘리는 차은우육면 같아요.”라고 말하는 세진. 이 여자 정말 신경 쓰인다.
겉으로 보면 세진과의 데이트는 정신없고 산만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안정감이 있다. 웃어도 괜찮고, 이상해도 되는 안전한 공기다. 그저 세진이 재밌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세진은 상대가 마음 놓고 웃어도 되는 안전망을 먼저 만들어준다. 연애에서 가장 강력한 친밀감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