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한 시기를 공유했던 만화, 게임 속 캐릭터를 당신 앞에 데려다 놓는 이가 있다. 음과 영으로, 섬세한 질감으로 그때를 소환하는 사람 모델러 ‘반도의 중년’ 박진이다. 그의 작품은 아버지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로봇을 품고 집에 가던 그 길, 잔뜩 쌓아놓은 만화책 책장을 넘기며 친구들과 낄낄거리던 오후 같은 오래된 시간들을 소환하는 매개체가 된다. 어쩌면 그가 빚어내는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또렷이 빛나는 것들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르겠다.
간단한 소개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반도의 중년’이라는 애칭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진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국내에 없는 제품들을 수집하고 희귀한 한정판들 모아서 전시하는 것에서 갤러리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만드는 일에 더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모으는 사람에서 만드는 사람으로, 어떤 계기로 역할을 바꾸게 되신 건지 궁금합니다.
제가 일본에 네트워크가 있어서 이전에는 국내에 없는 제품들이라던가 한정판, 희귀 아이템들을 들여와 선보이는 일이 많았어요. 과거에는 직구가 활성화되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들여온 제품들을 선보이는 전시 갤러리를 운영하면 모형 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시작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누구나 직구를 이용하고 이 분야에서 한정판이라는 것 자체가 크게 의미가 없더라고요. 제품보다는 기간 한정 정도의 의미니까요. 또 실질적으로 공식 사이트에서도 제품을 올리다 보니 굳이 제가 꾸린 갤러리에 오지 않아도 다 볼 수 있기도 하고요. 갤러리라는 공간의 메리트가 없어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아무리 제가 열심히 좋은 제품을 모은다고 해도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웃음).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던 차에 조금씩 도색 작업을 시작했는데 잘 만들면 한정판보다 가치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반도의 중년’이라는 이름이 독특한데 어떻게 지으신 건지.
수집을 시작하며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블로그를 한번 해 볼까’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거 같아요. 닉네임이란게 블로그에서도 중요하잖아요. 고민하던 차에 마침 열도 시리즈, 대륙 시리즈, 천조국 시리즈 이런 시리즈들이 유행했어요. 우리나라는 반도니까 반도국에 있는 흔한 중년이라는 의미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분야에서 나름 권위자로 통하시잖아요. 이력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 부탁드릴게요.
본격적으로 모델러 생활을 한 지는 사실 오래되지 않았어요. 한 5년 정도 됐으니까요. 대외활동을 하기 시작한 지는 4~5년 정도, 인스타그램으로 활동을 한 건 6년 정도가 됐네요. 운 좋게도 모형 대회 중에서 유일한 국제대회인 ‘GBWC(GunPla Builders World Cup)’에 출전해 2019년도에 통합 우승을 했어요. 그 덕에 월드그랑프리 국가대표로 출전했었고 코토부키야 대회도 나가 금상을 포함해서 몇 개 부분에서 수상을 했어요. 현재는 소규모 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도 소소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희 독자들 중에는 ‘모델러’라는 분야가 생소하신 분들도 많은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가볍게 즐기는 라이트 유저들은 기성품이 출시되면 조립하고, 전시하고 이 정도에서 그치기 마련이잖아요. 더 나아가면 한정판을 구매하게 되죠. 이제 그 위는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오너 메이드’인데 기성품도 싫고, 한정판도 별로 눈에 안 차는 사람들이 나만을 위한 제품을 만들고 싶거나 나만을 위한 커스텀 해 달라고 요청하세요. 지금 이런 요구를 가지신 분들의 의뢰를 받아서 제작을 하고 있어요. 3D쪽과도 협력하고 커스텀 페인팅을 하고 있습니다.
피규어 카테고리가 ‘오타쿠’ 문화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가 요즘엔 많이 바뀐 거 같아요.
맞아요. 옛날에는 ‘오타쿠는 히키코모리’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수집가 생활을 6년 정도 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사이 많은 인식 변화가 생겼다고 몸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실제로도 지금은 완구 시장이 조 단위로 넘어가요.
스타의 삶을 보여주는 라이프스타일 프로그램들을 몇 년간 지속해 방영이 되었잖아요. 방송에 이런 취미를 가진 분들이 꽤 많이 출연을 했어요. 이들을 통해 피규어, 게임 등의 문화가 뭍으로 많이 올라온 것도 인식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뭐 저런 걸 어른이 해’라고 사고 회로가 돌아갔다면, 연예인들이 향유하는 문화니 새삼 ‘저게 고급 취미인가?’ 이런 생각들을 무의식적으로 많이 하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봐요. 연예인들은 대중들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또 마블이 워낙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끈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거 같아요. 마블 캐릭터들의 관련 상품들을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 눈에 많이 보이잖아요. 쿠션부터 시작해서 캠핑용품 등등 없는 게 없으니까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나라도 이제 ‘원 소스 콘텐츠’들에서 나오는 멀티 상품들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어 자연스럽게 ‘이게 그렇게 뭐 특이하거나 나쁜 게 아니구나’ 하면서 인식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작업을 하실 때 어떤 포인트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말 그대로 ‘제가 좋아하는 것’을 만든다. 애니메이션이라든지 게임이라든지 어떤 콘텐츠를 접했을 때 거기서 되게 인상이 깊었던 장면 혹은 스타일에 관련된 소스를 찾아 제작하는 편입니다. 또 하나는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만드는 거죠.
또 저도 나이가 들고 그러다 보니 유년기 추억이 많이 생각나기도 해요. 레트로도 붐이기도 하고요. 흔히 우리 이야기하는 ‘추억 보정’이라고 하죠. 어릴 때는 어릴 때는 완구 퀄리티가 상당히 떨어졌으니까 색칠도 해보고 꾸며도 보고 싶었는데 아무런 지식도, 도구도, 방법도 몰랐기 때문에 그때 이제 못 했던 것들을 재해석해 보는 거죠. 어릴 때 추억들을 상상만 하던 걸 이제는 만들어 볼 수 있다는 재미가 정말 큽니다.
작업을 하며 가장 즐거운 순간은 언제인지.
앞서 말씀드린 내용과 연장선에 있는 것 같아요. 머리에 상상한 것을 실제로 손으로 만들 수 있을 때, 그때가 가장 재밌어요. 이 장면이 너무 멋있는데 만들려고 하면 사실 재료는 뭘 써야 되고 연출 그리고 도색은 어떻게 해야 할지 사실 깜깜하거든요. 그런데 어느 정도 실력이 되었을 때 내가 상상하는 그 이미지를 실제로 만들어 매칭하는 그 순간이 가장 좋아요. 앞에 있는 캐릭터들이 나온 지 거의 3~50년까지 되는 제품들이 많거든요. 저는 어쨌든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췄고, 그렇기 때문에 재해석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공장에서 만드는 피규어 혹은 다른 사람이 만드는 제품과 차별점이 있다면요.
피규어 같은 경우에는 실리콘까지 써서 진짜 극사실로 만들기도 하고 사람 피부의 질감을 구현하는 회사까지 나오고 있어요. 로봇, 메카닉 계열도 비싸게는 수백만 원 대까지 출시되고 있고요. 그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어떤 개성이나 그런 창작성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거든요.
저희는 하나 혹은 두 개 세 개 정도밖에 못 만들어내는데 그런 공산품들은 수백 개씩 찍어 내잖아요. 그럼 생산 단가가 낮을 아니에요. 그런데 저희는 그 퀄리티는 못 따라가고 생산 단가는 높고, 이러면 사실 누가 사겠습니까. 이런 지점을 고려해서 대량생산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제작해 보려고 하는 편이에요.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제가 주로 많이 하는 것들이 모듈레이션이나 그 맥스식 도색이라고 하는데 음영을 많이 줘요. 물론 공산품 중에서도 이렇게 출시가 되는 것도 있지만 사실 퀄리티가 떨어지거든요. 공장에서 제작하시는 분들은 매뉴얼대로만 하실 테니까요. 그 특유의 공산품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실감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취미였을 때와 업이 되었을 때의 차이가 있을까요.
취미의 영역에 머물렀을 때는 제 만족이었잖아요. 그래서 흠집이 나는 정도는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모르는 삼자들한테 평가받게 되는 입장이 되어 좀 부담이 많이 됐어요. 한 2년 정도는 의뢰를 받지 않았어요. 되게 부담이 되더라고요. 평가를 받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거 같아요.
그러던 때에 갤러리에 손님이 오셨는데 한정판 제품들을 몇백만 원어치를 사가셨어요. 제가 만든 것도 팔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차마 ‘그건 안 됩니다’라고 말을 못 하겠어 몇 개 판매를 하게 됐어요. 그런데 되게 좋아하셨어요. 내가 만든 게 괜찮은가 이런 생각도 들면서 자신감이 생겼던 거 같아요. 외국에서도 의뢰가 많이 들어와 좀 더 꼼꼼하게 또 열심히 해서 의뢰를 더 받아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 순간에는 마음이 편해졌어요. 다른 이야기지만 판매되면 월세 걱정도 안 해도 되고요. 그러면서 더 매력을 느끼게 됐던 거 같습니다.
추후 계획이 있으시다면.
예전에는 내가 했던 것들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이제 결혼을 하고 현실에 부딪히니 지금은 그냥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 다 건강하고, 제 딸한테도 ‘공부 못 해도 된다, 공부 어차피 어중간하게 잘해봐야 답 없다’ 행복 지수가 제일 중요하고 행복하다고 말해요.
저도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을 해서 행복을 채우고 있는 편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대단한 예술 작품을 남겨야겠다는 이런 거보다 건강하고 좋아하는 이들과 웃으면서 이야기 많이 나누고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대단한 사람, 뭐 이런 거 보다는 그냥 행복지수를 가장 우선시 하며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낼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임볼든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시간이란 건 직진성이 있죠.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지금 처해있는 현실이 힘드니까 어린 시절에 좋았던 기억들로 힐링하고 싶을 때가 많으실 거예요. 피규어나 프라모델을 만지시는 분들이 유독 이런 아련한 감성들을 많이 갖고 계신 거 같아요. 이 장난감에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기억과 추억이 많이 묻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많은 분이 꼭 피규어, 프라모델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한 시점을 추억할 수 있는 그러니까 기억을 묶어놓을 수 있는 장치를 하나 만드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사진이 될 수도 있고요. 언젠가 지치고 힘들 때 지금을 꺼내서 위로받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만나게 되시길 바랍니다.
※ ‘반도의 중년’, 그의 이야기와 작품세계를 영상으로도 만나보세요.
Part 1 처음으로 직접 공개하는 작품세계의 모든 것
Part 2 당신이 몰랐던 덕후들이 프라모델, 피규어를 모으는 진정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