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돌아온 한 해의 마지막 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금년에 안부를 건넬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 되새길 수 있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진부할지언정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진리,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매서운 풍파를 견디게 해주는 건 두꺼운 외투가 아니라 체온을 나눌 옆사람이니까.
연말 연초는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다. 방법은 다양하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될 수도, 진심어린 손편지가 될 수도 있다. 그중 가장 확실한 길은 선물이 아닐까. 속물처럼 보일지 몰라도, 모두들 누군가를 위해 생일 선물, 크리스마스 선물, 연말 연초 선물 한 번쯤은 준비해보지 않았나.
어떤 선물을 골라야 할지 어렵다면, 누군가의 애정 어린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긴 물건을 선택해 보자. 다정한 문구를 새겨 사랑을 온전히 담아낸 폴 뉴먼의 데이토나처럼 말이다. 선물과 함께 진심을 담은 한마디도 건네보는 건 어떨까? 투박해도 괜찮다. 그 마음에 거짓이 없다면 표현은 중요하지 않을 테니.
세기의 커플이 나눈 선물
랄프 로렌 니트 타이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 John Lennon – Imagine
셀러브리티의 러브 스토리는 대중에게 회자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명세만으로 만들어진 가십성 이야기 수준으로는 ‘세기의 커플’이 될 수 없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서로가 서로의 영감이 되어 평화와 희망, 사랑과 연대를 사회에 전한 그들은 이러니저러니 말은 많아도 세기의 커플이라는 타이틀에 가장 걸맞은 한 쌍임은 확실하다.
1980년 10월 9일. 존 레논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맞이했던 마지막 생일이었다. 존은 당연하게도 오노 요코와 그 시간을 나누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연인의 축하를 위해 여러 선물을 준비했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시계가 된 파텍필립 2499 퍼페추얼 캘린더 크로노그래프부터, 존 레논의 미국 이민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성조기 모양 넥타이 핀까지.
명성 못지 않게 부를 축적한 그들답게 값비싼 선물의 향연이었지만, 그 사이에는 전혀 다른 결의 물건이 하나 끼어 있었다. 바로 노란 줄무늬가 있는 투박한 블랙 니트 타이다. 보기에만 단출한 고가의 제품이라고 오해할 수 있겠다만, 이는 오노 요코가 그의 연인을 위해 직접 짰다고 알려져 있다. 존 레논이 졸업한 리버풀 콰리 뱅크 고등학교의 교복 넥타이를 본뜬 형태로 말이다.
이는 한참을 지나가버린 과거의 편린을 추억하게 하는, 다분히 의미로운 애정 어린 선물. 비매품이니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의의를 지니기도 하지만, 값을 책정해도 어마무시할 것이 틀림없다. 타이 제작을 위해 들인 오노 요코의 시간이 갖는 가치는 상상 이상일 터이니 말이다. 선물의 값어치를 환산하는 건 다소 부도덕한 행위로 느껴지긴 하다만.
니트 재질의 의류, 특히 액세서리는 유독 핸드메이드의 바이브를 머금고 있다. 부단한 손길로 만들어지는 만큼 온기가 느껴지는 선물이 되겠다. 하지만 직접 만들 시간과 손재주의 부재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이럴 땐 정성스러운 마음은 담아내면서 활용도까지 좋은 랄프 로렌의 타이는 어떨까. 비록 역사에 남을 커플은 되지 못해도, 선물을 건네는 그 날 하루는 가장 낭만적인 한 쌍이 되길 바라며.
국경을 넘은 사랑
슈퍼 닛카 위스키
사랑과 위스키는 닮아 있다. 시간이 더해질수록 깊이가 생기고,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층위가 얽혀 있으니까. 위스키 애호가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낭만적 면모는 어쩌면 이런 본질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대표적인 위스키 브랜드, 닛카 위스키가 품은 이야기는 이런 생각에 확신을 더해준다.
일본의 양조장 아들과 스코틀랜드 여성이 사랑에 빠진다는, 다소 생소한 설정의 일본 드라마 맛상(マッサン). 열도에 위스키 열풍을 불러온 이 작품은 사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로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라 불리는 타케츠루 마사타카와 그의 아내 제시 로베르타 코완(리타)의 러브 스토리다.
위스키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간 마사타카는 운명처럼 리타를 만나게 되었다. 양측 가족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그들은 함께 일본으로 귀국했다. 위스키 주조의 부푼 꿈을 안고 돌아왔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자금 조달의 어려움, 기술적 난관에 겹쳐 세계 대전까지 발발하며 마사타카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러나 그의 옆에는 리타가 있었다.
닛카 위스키가 세상에 선보여질 수 있었던 건 리타가 물심양면으로 마사타카의 꿈을 지지해 준 덕이었다. 이역만리이자 세계 대전의 적국인 일본에서 겪는 배척 속에서도 그녀는 묵묵히 마사타카의 곁을 지켰다. 위스키에 대한 마사타카의 열정과 리타의 헌신으로 닛카 위스키는 일본의 대표 위스키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러나 고된 타국 생활이 문제였던 건지, 리타는 63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마사타카는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장례식장에조차 나타나지 못했다. 그러한 그를 다시 일으킨 건 위스키에 대한 열정이었다. 이후 주조에 전념한 그는 아내를 향한 깊은 사랑을 표현한 위스키, 슈퍼 닛카를 발표했다. 부드러운 피트와 바닐라, 셰리의 달콤한 풍미를 통해 마사타카와 리타가 얼마나 감미로운 마음을 나누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사랑도 공식이 있나요
카시오 LOV-21A-1A
지금이야 MBTI가 세상을 주름잡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흔히들 문과와 이과로 인간 군상을 분류하곤 했다. 사고의 기저가 감성에 있는지, 이성에 있는지로 구별하는 거다. 요즘으로 치면 ‘너 T야?’ 정도 되려나. 이는 특히 연애나 사랑 주제와 결합했을 때 흥미로운 시너지를 발휘했다. 표현할 줄 모르는 이과 남자, 감정기복 롤러코스터인 문과 남자 중 누가 별로냐는 식으로 말이다.
한때 ‘이과의 사랑법’이라며 SNS를 떠들썩하게 했던 방정식이 있다. 바로 「x² –ǀxǀy+y²=25」. 수학과 데면데면한 사이라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도통 모르겠다면? 그래프를 보자. 우리가 익히 아는 모양이 나타날지니. 하트조차 수학으로 그려내는 이과식 낭만에 누군가는 질겁을 했지만 감명을 받은 사람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카시오는 연인을 위한 페어 시계인 러브 컬렉션(Lover’s Collection)을 전개하고 있다. 1996년부터 발매를 시작해 벌써 30주년이 목전이니, 어느 정도 역사와 전통이 있는 컬렉션이라 할 수 있겠다. 그중 소개하고자 하는 제품은 2021년 한정판. 앞서 설명한 사랑의 방정식을 디자인에 채용한 게 특징이다.
칠판에 적은 듯 밴드에 그려진 일명 ‘사랑방정식’은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이과적 매력을 뽐내는 중. 하이라이트는 두 시계를 나란히 놓았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하트다. x축과 y축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표식은 이과적 낭만의 표상과도 같다. 사랑방정식이야말로 연인이 공유할 수 있는 가장 감성적인 공통분모가 아닐까.
사랑은 손수건을 타고
드레익스 실크 포켓 스퀘어
한국 멜로의 교과서이자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유독 손수건이 자주 나온다. 이 작은 천조각은 단순한 소품을 넘어, 두 인물의 감정을 잇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처음에는 정원(한석규)도 다림(심은하)도 자신의 땀을 닦는 정도로만 쓸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정원은 비에 젖은 다림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다림은 정원에게 줄 음료수를 손수건으로 닦는다.
사실 손수건은 나보다는 남을 위한 물건에 가깝다. 영화 ‘인턴’에서 “누군가 눈물 흘릴 때 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언급했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손수건을 선물한다는 건 그저 땀이나 닦으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내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작은 무대를 마련해주는 의미라고 할까나.
드레익스의 실크 포켓 스퀘어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손수건이 아닌 재킷 가슴주머니에 꽂는 용도로 출시된 제품이다. 그래서인지 일상용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않은 포인트가 여럿 존재한다. 실크 70%, 울 30%로 부드러운 촉감과 고급스러운 색상을 자랑하지만, 원단 특성상 세탁을 자주 하면 변형이 가기 십상이다. 더욱이 도화지처럼 순백에 가까운 아이보리 색상은 작은 얼룩조차 선명하게 간직한다.
하지만 이를 그저 손수건이 아닌 사랑의 징표로 생각해 보자. 사랑의 순간을 담는 작은 캔버스 같은 존재로 말이다.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을 자주 빨아야 할 일이 없도록 서로를 더 아끼고 보살피자. 하지만 가끔 지저분한 자국이 남아도 괜찮다. 얼룩은 함께한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흔적이며, 우리의 사랑을 증언해줄 소중한 기록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