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2일, F1 쇼런이 열린 용인 스피드웨이 현장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13년 만에 열린 쇼런이니 그럴 만도 하다. 게다가 다른 팀도 아닌 메르세데스-AMG 페트로나스 F1 팀이 방문했으니. 아쉽게도 오늘 꺼내고자 하는 주제는 F1도, 메르세데스 팀에 대해서도 아니다. 바로 메르세데스팀 유니폼에 큼지막하게 이름이 새겨진 브랜드 이네오스(INEOS), 정확히는 이네오스 오토모티브(Automotive)의 이야기다.

이네오스 오토모티브는 탄생 배경부터가 여느 브랜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답답해서 내가 한다’. 오로지 랜드로버 디펜더에 대한 애정 하나로 시작된, 낭만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발테리 보타스 같은 F1 주행을 꿈꾸고 있다면 이 공간들에서 시작해 보자.
화학 재벌이 자동차 회사를 세웠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면 금액 문제일 뿐
국내에서는 메르세데스 F1 팀 후원사 정도로 알려진 이네오스지만, 실상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화학 기업이다. 적당한 수준이 아니다. 2024년 기준 매출액 168억 달러로 동종 업계 세계 9위를 기록한 어마무시한 스케일. 이네오스 그룹의 회장인 제임스 래드클리프가 상당한 부호라는 사실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뜬금없이 ‘이네오스 오토모티브’라는 이름의 자동차 제작사를 설립했다.
기업의 비전을 위해 영역을 확장한 것으로 오해하지 말자.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였으니까. 랜드로버 디펜더를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제임스는 2015년 1세대 디펜더가 단종되자 깊은 아쉬움을 표했다. 사실 그가 아니더라도 디펜더의 세대교체는 수많은 오프로드 마니아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마초적인 디자인의 대명사였던 자동차가 패밀리카처럼 부드러운 인상으로 탈바꿈했으니 말이다.

오리지널 디펜더를 포기할 수 없었던 제임스는 1세대 디펜더를 다시 생산해달라고 랜드로버 측에 몇 차례 요청했다. 돌아온 답변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이전의 구조를 유지한 상태로는 점점 더 강화되는 안전 및 환경 법규를 맞추기 어려웠다. 누가 부탁한다고 다시 만들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된 이상 판권을 인수하겠다고 다시금 랜드로버에 거래를 시도했지만 이 또한 성사되지 못했다.
여기서 조 단위 부자인 제임스 래드클리프이기에 가능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럴 바에 직접 만들겠다며 회사를 차려버린 것이다. 1세대 디펜더가 단종된 시기가 2016년 1월, 이네오스 오토모티브의 공식 법인 설립일이 2016년 12월 23일.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화학 기업의 수장은 자동차 브랜드의 대표라는 새로운 직함을 달게 되었다.
펍에서 태어난 자동차
전형을 벗어난 클래식으로
그가 이네오스 오토모티브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디펜더가 단종되면서 점차 사라져가는 정통 오프로더의 공백을 메우는 것. 전통과 정신을 계승하되 현대 기술과 내구성을 덧입힌 차를 만드는 것. 화려한 사양과 멋들어진 요소를 부각하는 요즘 차와는 다른, 진정 실용적이고 꼭 필요한 것만으로 채워진 차량의 탄생을 진심으로 바랐다.
비전은 누구보다 확실했지만, 현실은 자동차 경험이 전혀 없는 신생 회사일 뿐이었다. 업계에서도 공공연히 실패를 점쳤다. 제임스 또한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괜한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대신 세계 최고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과 손을 잡았다. 개발 과정에서는 벤츠 G-클래스를 생산하는 마그나 슈타이어와 긴밀하게 협력했고, BMW에서 실키식스 엔진을 공급받았다. 변속기는 ZF, 차축은 카라로. 사실상 교수님들의 조별 과제에 가까운 프로젝트였다.

디자인 쪽은 더욱 과감하게 접근했다. 자동차 업계의 관습에 갇히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네오스 오토모티브는 요트 디자이너인 토비 이큐어를 디자인 총괄에 앉히는 파격을 택했다. 두 차례 제임스의 요트를 제작하면서 인연을 쌓은 그였지만, 자동차 디자인 경력은 당연히 전무했다. 그럼에도 제임스는 걱정하지 않았다. 전통 오프로더의 단순함과 정직함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기존의 패러다임에 물들지 않은 인물이 적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네오스 오토모티브의 첫 작품, 그레나디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레나디어라는 이름은 래드클리프가 사랑하는 런던의 한 술집의 상호에서 가져왔다. 진정한 오프로더를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곳이기도 하다. 펍에서 맥주 한 잔 기울이며 농담처럼 오가던 이야기가 현실에서 실현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디펜더 짝퉁 아니냐고요?
근거 없는 말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공개된 그레나디어의 모습은 당연히 랜드로버의 디펜더와 닮았을 수밖에 없었다. 태생부터 디펜더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기에, ‘모조품’이라는 비판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하지만 토비 이큐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능성과 실용성을 중심으로 설계하다 보면 자연스레 디펜더와 유사한 형태가 된다는 것이 요지였다. 공구함을 올려놓기에 가장 적합한 보닛의 디자인은 평평하고 각진 형태인데, 디펜더가 그랬듯 그레나디어 역시 기능적인 요구에 따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랜드로버가 이러한 상황을 두고 볼 리 없다. JLR(재규어-랜드로버)은 그레나디어의 디자인이 디펜더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영국 법원에 상표권 및 디자인권 소송을 제기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JLR이 이겨야 할 싸움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승자는 이네오스였다. 디펜더의 2박스 디자인은 오프로드 4×4 차량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보편적 디자인이라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이후 미국, 유럽 등 다른 시장에서도 추가 소송전을 벌였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중의 반응은 어땠을까? 법적 문제를 해결했음에도 디자인의 유사성에 대한 지적은 여전히 이어졌다. 닮아도 너무 닮아 오마주를 넘어 복제 수준이라는 비판이었다. 반면 더 이상 디펜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진짜 오프로드 감각’과의 재회에 반가움을 표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여론은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은 채 팽팽하게 양립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성패를 좌우할 핵심은 결국 주행 성능이었다. 그레나디어는 단순히 ‘디펜더의 향수를 자극하는 차’로 머물 생각이 없었다. 강철 레더 프레임과 솔리드 액슬, 짧은 오버행, 높은 차체 등 오프로더의 정석이라 할 만한 구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고, 오버헤드 컨트롤 패널과 수평 대시보드 등 실용적 설계가 곳곳에 배어 있었다. 감성적 상징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짜 험지를 달릴 준비가 된 자동차인 셈이다.

대중의 의심 섞인 시선과 가혹한 테스트 환경 속에서 그레나디어는 예상 밖의 호평을 끌어냈다. 빙판, 진흙 길 등 극한 조건을 통과하는 실험 주행에서 견고함과 제어력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여러 전문 매체가 ‘목적에 충실한 오프로더’라고 평했다. 정통 오프로더의 감성을 현실로 되살리겠다는 제임스 래드클리프의 꿈은 그렇게 한 발짝 현실에 가까워졌다.
앞으로의 이네오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을까
하지만 낭만 어린 행보가 시장에서 곧바로 통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출시 전 구매 희망자가 17,000명이 넘었던 데 비해, 실제 판매된 수량은 그보다 훨씬 적다는 게 현재까지의 정황이다.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가격. 저렴하고 실용적인 차량을 목표로 시작된 프로젝트였지만, 엔진 등에 고스펙 사양을 탑재하면서 가격이 예상보다 훨씬 비싸졌다. 현재 그레나디어는 국내 기준 1억 4천만 원이라는 고가에 판매된다.
이네오스 오토모티브의 여정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그 발걸음이 결코 매끄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2024년 2월 브랜드 최초의 전동화 모델 퓨질리어(Fusilier)를 공개했으나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출시 일정을 무기한 연기했다. 전기차에 대한 소비자 수요 저조와 정부 정책의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부품 수급에 차질을 겪으며 그레나디어의 생산을 중단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네오스 오토모티브는 신생 브랜드로서 규모의 경제와 산업 인프라 측면에서 도전 과제를 안고 있다. 유럽 내 내연기관 차량 금지 정책이나 전기차 인프라 부족, 글로벌 공급망 불확실성 등 현실적인 어려움 또한 막중하다. 하지만 이네오스는 이를 통해 효율적 생산, 신기술 적용, 제품 철학의 명확화 등에서 한층 단단해질 수 있었다. 작은 브랜드가 겪는 어려움은 미래 혁신의 밑거름이 된다.
이들의 행보는 단순히 출발만 한 브랜드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레나디어가 보여준 정통 오프로더의 감성은 시장에서 실제로 유의미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제 이네오스는 어떻게 하면 전통을 잃지 않으면서 미래 기술과 양립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 물음의 답이 아직 완성되진 않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이미 한 가지를 증명했다는 점이다. 진짜를 만들겠다는 의지 하나로도 세상은 움직일 수 있다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