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할리우드의 중후한 아재들은 온통 아메리칸 크루저를 타고, 홍콩을 누비던 멋진 형들은 레플리카 바이크로 도로를 질주하던 광경. 우리에게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된 이 풍경은 1990년대 영화 속 모터사이클의 가장 상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용암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엄지를 치켜세우던 장면을 기억하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팻보이의 스로틀을 비틀어가며 달리던 아놀드 형님의 모습이 더욱 강렬하게 남아있을 터. 만약 당신이 후자에 속한다면, 이제부터 천천히 그 추억을 음미해보길.
천장지구(1990) – 스즈키 RG500
‘피빛으로 빛나는 의리, 그리고 아픈 사랑의 노스탤지아!’ 80~90년대 특유의 비장미 넘치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이 캐치프레이즈가 잊히지 않는 이유는 뭘까. 평범한 스토리마저 잊게 할 정도로 감수성을 폭발시키는 유덕화와 오천련의 카리스마, 그리고 엔딩에서 펼쳐지는 아련한 영상미 덕분이리라. 영화가 가진 진정성이 결국 손발이 오그라드는 캐치프레이즈마저 장엄한 명문으로 바꾸어 놓았으니 말이다.
남자들이 이 영화에 열광한 결정적 장면은 바로 클라이막스에 나오는 모터사이클 신이다. 훔친 웨딩드레스를 오천련에게 입히고, 그녀를 뒤에 태운 채 피를 흘리며 달리는 유덕화의 처절하고도 애수 어린 표정. 이 모습은 20세기의 남자들에게 ‘여자는 바이크 타는 남자를 멋있게 바라본다’ 같은 희대의 오해마저 심어주었다.
그리고 중요한 점 하나 더. 만약 이 장면에서 유덕화가 스즈키 RG500이 아닌, 그저 평범한 슈퍼카(?)에 오천련을 태우고 달렸다면? 모르긴 몰라도 이 클라이막스의 영상미는 급격히 반감했을 것이다.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1991) – 할리데이비슨 팻보이
1편에서 사라 코너를 노리던 희대의 살인병기, 귀신보다 더 무서웠던 터미네이터 아놀드 형님은 2편에서 엽기적인 수준의 반전을 일으키며 ‘우리 편’이 됐다. 그런 그는 영화 초반, 존 코너를 구하기 위해 한 손으로 샷건을 장전하고, 우렁찬 배기음과 함께 나머지 한 손으로 팻보이의 스로틀을 비틀어가며 내달렸다. 단언하건대 20세기 영화 중에서 남성성이 가장 멋지게 그려진, 수컷의 말초적인 테스토스테론을 자극하는 모터사이클 신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도 할리데이비슨 팻보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터미네이터의 오토바이’로 기억되는 모델이다. 여전히 할리데이비슨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로, 브랜드의 소프테일 라인업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고 있다. 물론 현재의 팻보이는 그때와 달리 전자 장비도 달리고, 덩치도 더 커지고, 파츠 역시 보다 더 현대적인 컬러 톤으로 재정비되긴 했지만.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1991) – 혼다 XR80
팻보이가 상징적으로 떠오르는 터미네이터 2지만, 사실은 몇 대의 모터사이클이 더 등장한다. 추격자인 T1000도 중간에 경찰 바이크인 가와사키 KZ1000을 타고 건물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긴 비중을 차지했던 건 바로 존 코너를 연기한 에드워드 펄롱의 발이 되어준 혼다 XR80이다.
XR80은 혼다의 경량 오프로드 엔듀로 바이크인 XR 시리즈에서 막내 라인을 담당하는 모델이다. 물론 그 아래로도 배기량 50cc, 70cc, 75cc 등의 바리에이션이 있었는데, 어쨌든 혼다는 XR80까지 이들을 하나로 묶어 스몰 XR 시리즈로 통칭했다. 이들은 법적으로 공도 주행을 할 수 없지만, 어린이들도 연습용으로 충분히 탈 수 있는 모터사이클이었다.
다만 영화의 스턴트 신에서는 XR80이 아닌 XR100이 쓰였다. 이유인즉슨, 대역으로 스턴트를 촬영하는 성인 배우의 몸집에 맞추기 위함이었다고. XR80에 성인이 올라타면 마치 세발자전거를 탄 어른 같은 비율로 보였고, 결국 한 체급 높은 XR100으로 대역 스턴트 촬영을 마쳤다. 다만 XR 시리즈는 4행정 바이크임에도 불구하고 주행사운드를 2행정 바이크 소리로 녹음한 것은 옥에 티.
열화전차(1995) – 혼다 NSR250R
라이더들에게 최고의 바이크 영화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십중팔구 ‘열화전차’를 꼽는다. 영화는 온통 모터사이클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하다. 물론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하지만 스크린 너머의 모터사이클은 누가 보더라도 빠르고, 또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 모터사이클은 영화적 장치나 소품이 아닌,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 도로를 질주한다.
이 영화를 추억하게끔 만드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지금은 환경규제로 도로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2행정 모터사이클의 감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 작품의 화룡점정은 유덕화와 오대유의 마지막 경주 신인데, 여기서 활약하는 바이크는 혼다의 전설적인 레이스 머신을 양산차로 만든 NSR250R이다. 4행정 바이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카랑카랑한 배기음이 귀를 때리고, 그 위에 아슬아슬한 와인딩의 속도감이 덧입혀지며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007: 네버 다이(1997) – BMW R1200C
바늘과 실처럼, 007 하면 그 뒤에는 이제 애스턴마틴이 따라붙는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치다. 사륜차가 아닌 이륜차로 눈을 돌려봐도, 역시 007 시리즈에선 같은 자국 브랜드인 트라이엄프의 모델을 주로 떠올리기 마련. 하지만 1997년 작 ‘007: 네버다이’에서는 꽤 독특한 조합이 탄생하기도 했다.
‘본드카=애스턴마틴’의 공식을 깬 건 바로 BMW로, 이들은 90년대 007 시리즈 중 총 세 편에서 활약했다. ‘007: 네버다이’에서는 E38 750iL이 본드카로 등장했는데, 이와 호흡을 맞춘 모터사이클 역시 BMW 모토라드의 바이크였다. 심지어 영화에 등장한 차량은 BMW가 할리데이비슨과 맞붙어보겠다며 브랜드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혔던, 당시 그들의 유일한 크루저 바이크인 R1200C였다.
안타깝게도 영화의 흥행과는 별개로, 이 R1200C는 (당연하게도) 할리데이비슨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BMW는 결국 얼마 못 가 백기투항을 했고, 그렇게 R1200C는 단종이라는 비운을 맞이한다. 하지만 미련이 아직 남았던 것일까. 최근 BMW는 옛 헤리티지를 살려 R18이라는 크루저 모델을 십수 년 만에 다시 내놓았다. 뭐,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