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파일럿 시계의 역사와 기능을 다루는 족집게 강의는 여기서 만나볼 수 있다.
저번 다이버 시계 추천 글에서 아쉬웠던 점을 꼽으라면, 롤렉스나 오메가처럼 누구나 알지만 빼놓을 수 없는 브랜드를 끼워 넣느라 좀 더 저렴하고 다가가기 쉬운 시계들을 많이 못 다뤘던 점이다. 누가 비싼 시계 좋은 거 모르겠나. 하지만 이번엔 파일럿 시계의 실용적인 기원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가성비 뛰어난 중저가 파일럿 시계만을 가지고 왔다. 브레게, IWC, 제니스 등 파일럿 워치 하면 떠오르는 고가의 브랜드도 물론 영상에서는 빼놓지 않고 다루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또 한 가지, 파일럿 시계는 큰 맛에 차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일상생활에서 무리 없이 찰 수 있는 38~44mm 크기로 골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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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뜸 ‘뭣이 중헌디?’라고 물으면 ‘디자인’이라고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벨앤로스(Bell & Ross). 1993년에 설립된 신생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떠올리는 독자적인 디자인을 보유한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그들이 디자인을 중요시한다는 것은 시계는 물론이고 책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V1-92처럼, 사각형 케이스의 인스트루먼트 시리즈 외에도 눈길을 끌 만한 시계가 많다. 무브먼트는 평범한 ETA를 쓰지만 벨앤로스는 역시 외형 때문에 차는 거니까. 38.5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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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 중저가 시계를 추천하지 않는 이유가 더 저렴한 시계와 럭셔리 시계 사이의 모호한 포지셔닝 때문인데, 이런 출중한 디자인이라면 추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스페셜 에디션은 브론즈지만 스틸도 있고 다이얼 컬러도 다양하다. 4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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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시계 메이커 중 가장 ‘시크’한 분위기를 풍기는 진(Sinn). 단 하나의 스포츠 워치로 독일 시계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망설임 없이 진을 추천한다. 사실 마음에 드는 게 많아 진의 파일럿 시계를 하나만 고르는 것도 무척 어려웠다. 비행사에 의해 설립된 회사 아니랄까 봐. 41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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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에서도 센터로 등장한 스토바(Stowa) 플리거 클래식. 랑에 운트 죄네, IWC, 라코, 벰페와 함께 2차 대전 오리지널 플리거 시계를 생산했던 회사다. 데코레이션이 들어간 탑 그레이드 ETA 무브먼트, 블루 핸즈, 커스터마이징 가능한 옵션, 그리고 깊은 역사를 생각하면 딱히 대안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IWC 스핏파이어를 사기 위해 저금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실용적인 플리거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까. 4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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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저가 오리지널 플리거로 스토바와 쌍벽을 이루고 있지만 스토바보다 한술 더 뜬 물량 공세를 펼치는 라코(Laco)다. 케이스 사이즈는 물론 무브먼트, 색상, 빈티지 피니시 등 고를 수 있는 웬만한 옵션은 다 갖추고 있다. 더구나 옵션마다 정성스레 이름까지 하나하나 다 붙여서 말이다. 스토바가 좀 더 현대적인 디자인이라면 라코는 충실한 복각판이다. 다만 그 정확한 재현 덕에 자칫 ‘밀덕’ 느낌이 날 수도 있으니 잘 생각해보고 선택하자. 4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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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독일군 시계만 나와서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면, 영국 공군 스타일의 론진 헤리티지 밀리터리에서 안식을 찾자. 이 시계의 최대 장점은 빈티지 느낌을 그대로 살려 텍스트를 거의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케이스 백에도 어떤 문양이나 글자도 적혀 있지 않다. 38.5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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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 스타일도 좋지만, 현대적인 디자인이 그리울 때도 있다. 알피나(Alpina)의 파일럿 시계들은 살짝 IWC의 빅 파일럿 라인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중고로 일반 IWC 마크 시리즈 가격의 십 분의 일(빅 파일럿의 삼십 분의 일) 정도로 구할 수 있어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 발랄한 색 조합과 큼지막한 크라운이 포인트. 44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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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비를 논하면서 해밀턴이 빠질 순 없다. 필드 라인은 최근에 영화 ‘인터스텔라’ 스페셜 에디션 카키가 출시돼 또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했다. 4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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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무려 1882년에 설립된 파일럿 시계 역사가 깊은 브랜드로, 오늘날까지 크로노그래프를 만들고 있다. 조금 더 가격이 나가긴 하지만 한하르트(Hanhart)의 빈티지 스타일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도 꼭 살펴보기 바란다. 4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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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워치 전문 융한스(Junghans)라 그런지 파일럿 시계의 자태도 예사롭지 않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꽤나 깊은 역사를 지닌 모델로, 1955년 서독의 연방군 파일럿들을 위해 만들어진 융한스 시계의 현대 버전이다. 케이스는 43mm로 커졌지만 곱게 빠진 12각형의 케이스의 모양은 그대로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