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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 디자이너가 슈트를 말한다: 맞춤 정장 팁 3
2023-02-22T19:03:23+09:00

이제 테일러숍에서 주눅 들지 말자. 나 슈트 좀 아는 남자니까.

맞춤 정장 한 벌에는 세월이 녹아있다. 수십 년간 초크와 실과 바늘을 끼고 더욱 완성도 있는 옷을 위해 노력한 이들의 노고가 배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옷은 시간과 함께 나이 들어간다. 이것이 슈트의 매력이다. 시간의 경이가 빚어낸 이 한 벌, ‘맞춤 정장 팁 3’을 찬찬히 읽은 후 당신의 슈트와 다시 눈 마주친다면 농도 짙은 매력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 ‘맞춤 정장 팁 2’에 이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자. 재단이 끝난 원단들은 봉제로 넘어가 장인들의 손에서 시침질 된다. 이는 가봉을 보기 위한 전 초 단계다. 가봉을 본다는 건 옷을 완성하기 전, 몸에 잘 맞는지를 확인하고자 듬성듬성 호아서 바느질한 원단을 손님 몸에 입히는 절차다. 설긴 바느질이 된 이 옷을 착용하고 당신은 첫 번째 피팅을 하게 된다. 이제 또 다른 긴장의 시간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꼼꼼하게 옷을 봐야 한다는 소리다.

우선 셔츠부터. 고객인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셔츠를 바지 속으로 얌전하게 집어넣는 일이다. 배 바지 상태로 기다리면 테일러는 이제 매의 눈으로 꼼꼼히 셔츠를 체킹한다. 셔츠 피팅에서 꼭 챙겨야 할 부분, 밑줄 긋자. 우선 목 부분 단추를 채우고 손가락 두세 개가 들어갈 정도의 여유가 있는지 확인할 것. 이 정도의 넉넉함이 타이를 착용했을 때도 숨쉬기 편안하고, 보기에도 적당하다.


목 부분 단추를 채우고 손가락 두세 개가 들어갈 정도의 여유가 있는지 확인할 것.

그다음 품과 어깨너비도 유심히 보아야 한다. 점심을 먹고 의자에 앉았을 때 앞 단추가 벌어지지 않는 정도가 좋다. 타이트한 셔츠를 입어야 날씬해 보일 것이란 착각은 금물.

반기를 들고 싶다면, 잠시 이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길. 셔츠는 원래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남자들만 입는 속옷의 개념이었다. 여기서 착안해 여성 속옷 슈미즈가 생겼고 현대에 와서 셔츠로 이어지게 된다. 셔츠란 무릇 편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뚱뚱한 몸매를 가진 사람일수록 옷을 여유롭게 입어서 자신의 바디 실루엣을 남에게 들키지 말도록.  

다음은 바지를 피팅해 보자. 최근 10년 동안 유난히 남자들의 슈트 바지 기장이 짧아진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과거에는 큰 통이 대세였는데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1970년대에는 기성복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양복을 맞춰 입었다.

하루에도 너무 많은 손님을 상대하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테일러들은 바지 기장을 구두 밑창에 닿고도 남을 만큼 길게 만들었다. 아울러 사람 머리가 드나들 만한 넓은 바지통으로 제작하기도. 정확하게 옷을 만들만한 여유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넘쳐났으니까 이해는 된다. 이런 상황에 기인해 큰 바지통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테일러 입장에서는 재킷보다 바지 피팅이 더 힘들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유난히 기장과 밑통에 민감해진 ‘요즘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적당한 바지 기장과 밑통을 찾아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 짚고 가자.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었을 때 밑단이 신발에 닿고, 앞 주름이 브레이크 없이 일자 칼 주름이 섰을 때가 가장 좋은 기장이라는 것을.


너무 짧은 기장은 이미 한물갔다. 복숭아뼈 위로 올라가는 바지를 입지 말아라.

또 하나의 중요한 팁. 패션에 관심이 많은 당신이라면 이미 캐치 했겠지만, 너무 짧은 기장은 이미 한물갔다. 복숭아뼈 위로 올라가는 바지를 입지 말아라. 당신은 매거진 ‘레옹’에 나오는 일명 걷기만 해도 화보가 되는 이탈리안이 아니다. 아울러 괜한 기우에 첨언하자면 여름에도 양말은 꼭 신자. 특히 가죽이나 스웨이드 슈즈에 맨발로 슈트를 입은 사람들은 신발 속 냄새까지 상상되니까.

셔츠와 바지 피팅이 끝나면 다음은 재킷이다. 길이는 뒤에서 봤을 때 엉덩이 끝부분까지 오도록, 품은 허리 뒤쪽으로 주름이 져 옆구리 살이 드러나지 않도록 여유를 주자.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앞모습에 신경을 많이 쓴다. 앞에서 보았을 때 재킷 허리선이 쑥 들어가면 날씬해 보인다는 착각을 하기 마련. 정작 자신의 뒤태는 썩 훌륭하지 않은데 말이다.


재킷 가봉 시 테일러에게 카라 뒤 부토니에르(boutonnier) 꽂게를 만들어 달라고 말하자.

여기서 진짜 내공을 보여줄 차례. 재킷 가봉 시 테일러에게 카라 뒤 부토니에르(boutonnier) 꽂게를 만들어 달라고 말하자. 아울러 실 색상도 정해준다면 테일러는 당신을 슈트 고수쯤으로 바라보고 더 섬세하게 신경 써 줄 것이다. 혹시 부토니에를 모르는 이를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는 남성복 슈트 라펠 위에 꽂는 작은 장신구를 말한다. 작은 꽃을 라펠 위쪽 단추 구멍에 꽂고, 테일러에게 주문한 카라 뒤쪽 부토니에르 고리에 꽃줄기를 고정하면 된다.

셔츠, 바지, 재킷의 디테일을 꼼꼼히 확인하며 가봉을 마친 슈트는 이제 다시 공장으로 들어가 재단사의 테이블 위에 놓인다. 수정한 사항들을 점검해 잘라낼 부분은 잘라내고 보탤 부분은 더 채워 넣는다. 이때 제일 중요한 건 테일러와 재단사의 호흡. 찬찬히 수정사항을 고치고 조각으로 분리된 옷들은 작업지시서와 함께 아침에 봉제 장인들 작업판 위에 올려놓는다.

장인이란 말을 섣부르게 사용했다고 생각하지 말길. 봉제 장인들은 20살이 되기도 전에 양복공장에 들어와 숯 다리미에 사용할 숯을 피우고, 매일 아침 본인의 선생님이 사용할 풀을 쑤는 등 궂은일을 견딘 이들이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40년 넘는 시간을 양복과 함께 보내온 이들이 장인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제 정말 막바지 작업만 남았다. 손바느질 달인이 단추 구멍과 브랜드 라벨 등을 달며 섬세한 마무리 작업을 한 후 다림질 파트에 넘겨진다. 쉬워 보이는 다림질도 제대로 하려면 경력 30년 정도는 되어야 명함을 내밀 수 있다. 원단 특성에 따라 다림질 방법을 달리해야 하니 여간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테일러 숍 옷걸이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혹시 입다가 체형이 변해 핏을 고쳐야 한다면 주저 말고 본인의 테일러에게 부탁하자. 영국의 찰스 황세자는 슈트와 신발을 대부분 30년 이상 간직하고 수선해서 입는다. 작년 5월 둘째 아들 해리 왕자의 결혼식 때도 1984년에 맞췄던 회색 모닝 슈트를 수선해 입고 참석해 회자된 바 있다.


당신에게 100% 잘 맞는 슈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완벽하지 않은 우리 인생처럼 말이다.

우리 신체는 공장에서 찍어 내온 공산품처럼 정확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다. 아침에 기상했을 때와 저녁에 잠자리에 누웠을 때도 모양이 유기적으로 변하고 날마다, 달마다, 그리고 해마다 다른 형태를 취한다. 고로 이 세상에 당신에게 100% 잘 맞는 슈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완벽하지 않은 우리 인생처럼 말이다.

이렇게 대장정이 끝났다. 당신의 의뢰한 한 벌의 슈트가 이런 세심한 과정을 겪으며 당신 앞에 당도한 것이다. 감격스럽지 않은가. ‘맞춤 정장 팁 1’, ‘맞춤 정장 팁 2’와 이 글까지 모두 읽었다면 설마 “알아서 잘해주세요”라는 어리숙한 말은 하지 않겠지. 당신의 테일러에게 애송이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저 멘트는 금물이다.

테일러 슈트를 아직 입어보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앞서 언급한 사항들을 참고하여 슈트 한 벌에 당신만의 감성을 녹여내 보길 바란다. 당신의 소중한 인생 순간순간에 이 슈트가 기분 좋은 한 조각으로 자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