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개봉 당시에는 평단과 관객 양쪽 모두에게 외면받은 슬픈 작품이었다. 시사회의 반응에 놀란 제작사가 억지로 끼워 넣은 추가 엔딩조차 작품 내내 흐르던 어둡고 암울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깨기에는 역부족이었을까. 진보된 기술에 비해 열악한 환경, 인간이 만들어 냈지만,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한 질투, 그리고 열등감을 폭력에 기대어 해결하고자 하는 군상들.
온갖 마블 캐릭터들이 화려한 유니폼과 최첨단 기술을 두르고 고생은 좀 할지언정 끝내는 범우주적 사이즈의 악당을 물리치는 요즘의 히어로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무엇. 이 글은 조금은 다른 시각을 가진 장르인 사이버펑크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왜 그들이 본 미래는 모두 디스토피아일까
장르의 이름에서 미루어 짐작되듯, 사이버펑크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 것일까? 위태로운 디스토피아와 질척거리는 불쾌함, 탈출구 없는 절망과 파괴적인 위험들 그리고 상실된 인간성은 사이버펑크 장르의 대표적인 클리셰로 쓰인다.
위태로운 디스토피아와 질척거리는 불쾌함, 탈출구 없는 절망과 파괴적인 위험들 그리고 상실된 인간성은 사이버펑크 장르의 대표적인 클리셰로 쓰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폭발적으로 확장된 네트워크와 테크놀로지 사회는 미래에 대한 기대뿐만 아니라 불안도 같이 불러왔다.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과 함께 일본의 경제 잠식과 오리엔탈리즘이 절묘하게 맞물려서 만들어낸 불안감은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보다는 무언가 모자라고 기울어진 디스토피아에 어울리지 않았을까? 이런 시대상 속에서 싹을 틔운 사이버펑크는 그 불안감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나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작가적 상상력을 스크린으로 옮겨 토대를 쌓고 색을 입히는 것은 감독들의 몫이었다. 그 때문에 이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처음과는 많이 다르게 바뀌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는 없다.
원자 폭탄의 공포
세계대전을 종식한 원폭 투하의 영향은 사이버펑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키라(1988)는 3차 세계대전으로 붕괴한 네오도쿄를 배경으로 했고, 터미네이터2(1991)의 부제인 심판의 날은 핵폭발로 인해 수많은 인류가 몰살되는 날이다.
모르는 이가 없을 매트릭스 트릴로지(1999, 2003)의 세계도 인간이 승리를 위해 선택한 핵폭탄 투하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하는 발화점이었다. (실제로 이 배경에 대한 설명은 애니 매트릭스에서 설명하고 있다) 뭐, 냉전의 시대에 공감할 수 있는 가장 큰 공포는 핵전쟁으로 인한 지구 공멸 시나리오였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부서져 버린 땅 위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계급 격차로 인한 부당함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기계의 지배를 부정하고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 투쟁을 계속하기도 하고, 어처구니없이 기계의 에너지원을 위한 건전지 역할로 전락하기도 했다.
핵전쟁이 초래할 두려운 미래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한 경고는 없지 않을까?
체제에 대한 도전
이렇게 암울한 미래에 관한 얘기만 늘어놓았다면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는 시대의 뒤로 물러난 하나의 서브컬쳐로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이버펑크에서 또 다른 매력을 찾을 수 있다. 바로 타인에 의해 정해진 넘을 수 없는 유리천장에 순응하지 않고 끊임없이 거부하며 대항하는 모습이다.
가타카(1997)는 유전자를 조작하는 인공수정을 거치지 않아 열성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빈센트가 신분을 속이고 우주여행의 꿈을 이뤄내는 이야기다. 알리타: 배틀엔젤(2019)의 갈리는 고철마을 휴고의 꿈을 대신해 공중도시 자렘을 목표로 한다. 이퀼리브리엄(2002)의 프레스턴은 약물을 통해 감정조차 허용 않는 통제 정부와 독재자를 무너트리고 모두에게 감정의 자유를 선물하게 된다.
이렇게 사이버펑크는 기존의 체제를 해체하여 새로운 상징을 통한 신화의 창조에 성공하였고, 이를 통해 새로운 문화의 한 장르로 당당히 인정받게 되었다. 형식을 거부하고 본질을 찾아가는 어떤 사상과도 비슷하지 않은가?
Original vs Copy
마지막으로, 사이버펑크에는 하나의 심오한 철학적 고뇌가 숨어있다. 바로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이다.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이 단순한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의 결과로 생긴 키치(kitsch)와 예술(art)의 혼란으로 고민했던 것처럼, 발달한 기술이 만들어낼 수많은 복제, 그중에서도 인간을 흉내 낸 복제품은 과연 인간인가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얼터드 카본(2018)에서는 저장소라는 장치를 통해 모든 기억이 보관되고 이를 전송, 복제하여 새로운 슬리브(육체)로 옮겨 죽음이 사라진 영생을 누리는 계급이 등장한다.
공각기동대(1995)는 전뇌화 기술을 통해 직접 뇌에 연결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의식이 직접 네트워크에 접속, 타인을 해킹하는 일도 벌어진다. 물론, 전뇌만 있다면 기계로 된 몸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블레이드 러너(1982)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구분하기조차 불가능한 너무나 인간적인 레플리칸트를 잡는 은퇴한 형사의 이야기다.
니체에서 시작한 영과 육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해답의 과정, 나아가 영생이라는 인류 최대의 욕망에 대한 고찰마저 사이버펑크에서는 현재 진행형이다.
진지한 척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끌어오며 사이버펑크에 대해 말했지만, 이런 의미를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사이버펑크는 비주얼적인 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즐길만한 장르라고 말 할 수 있다.
블레이드 러너 하면 떠오르는 특유의 뿌연 하늘 속 현란한 네온으로 번쩍이는 미래도시와 날아다니는 자동차, 처음 본 순간 전율이 일었던 아키라의 모터사이클 추격신, 물속에서 한 꺼풀씩 벗겨지며 드러나는 의체 인트로의 공각기동대,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총알을 피하던 네오와 360도 정지화면의 매트릭스까지. 영상미는 사이버펑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매력임은 분명하다.
사이버펑크는 비주얼적인 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즐길만한 장르라고 말 할 수 있다.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인 2019년을 훌쩍 넘겨버린 미래인이지만, 팝콘 한 봉지 준비해서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어 영화 한 편 어떨까? 언급하지 못한 숨겨진 명작뿐만 아니라 봤지만, 다시 보고 싶어진 영화가 있다면 지금, 틀어야 할 때다.
Edited by 정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