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 개봉한 영화 ‘막다른 골목의 추억’은 요시모토 바나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인생을 상투적인 표현에 기대 바다라 부르기로 하자. 포말만 일렁였던 삶에 커다란 파도가 몰려왔다면, 그렇게 어둡고 검은 물속을 처음 보았다면, 일상은 침몰당하기 마련이다. 이 광막한 슬픔에 익사하지 않고 보란 듯이 유영하기 위해선 파도가 건네는 말에 귀 기울여 봐야 한다. 이 영화는 몰아치는 너울 속에서도 어떤 위로가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적인 파도의 전언이다.
서로를 안다는 전제는 사랑을 위험하게 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속단하기 쉽고, 섣부른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변모할 테니까.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라고 말하는 유미의 태도는 관계 속에서 사실, 불온하다. 믿음이 선의로 돌아오는 이야기 따위는 이제 철 지난 신파에 불과할 뿐이다. 통 연락이 닿지 않는 퍼슬퍼슬한 현재를 느낀 유미는 4년째 연애 중인 약혼자 태규(안보현 분)를 찾아 그가 있는 나고야로 향한다.
하지만 유미는 그의 집에서 이 관계의 마지막을 선명히 목도한다. 태규는 유미에게 그의 새로운 연인 아야(히라타 카오루 분)를 앞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라고 얘기한다. 함께 사랑을 나누던 언어가 아닌 이제 새로운 시간을 쌓아가는 아야와 태규의 말, 일본어로 말이다. 외면했던 이별은 현실이 됐다. 유미는 태규의 면상 위로 침 한번 뱉지 못하고 그 집을 걸어 나온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고, 감정의 연결은 구걸과 애걸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으니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녀는 낯선 도시에서 혼자가 되기로 한다. 그의 흔적이 도처에 놓인 서울은 그녀에게 아직 버거웠을 테니까. 심지어 그곳엔 반려하고 싶은 가족들의 부담스러운 관심과 위로까지 있다. 그렇게 유미는 나고야를 걷다 막다른 골목에서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를 겸하는 ‘엔드포인트’를 만난다.
유미는 ‘엔드포인트’에서 창밖을 응시한다. 늘어지게 잠을 잔다. 캘리그라피를 한다. 감정 소모로 흩어져 있던 시선을 자신 안으로 거둔다. 누군가 건네는 진심 어린 위로도 그 상황과 자신을 견딜 수 있을 때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법. 그녀는 이런 일련의 행위들로 자신과 만나고, 미처 돌보지 못했던 뒷모습에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는 이들과 온기를 나눈다. 그렇게 막다른 골목에서 유미는 봄을 만난다. 다 지우고 다시, 시작해도 좋을.
깊은 눈과 차분한 어조로 이별과 지금을 말하는 유미역은 연기자로서 탄탄한 필모를 쌓고 있는 수영이 열연했고, 유미의 말벗이 되는 동생 유정은 스웨덴 세탁소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떠오르는 신예 배누리가 맡았다. 감초 연기도 빠질 수 없는데 진성역의 동현배와 ‘엔드포인트’를 지키는 니코 역의 이정민도 영화에 봄바람 같은 활기를 불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