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좋아한다면 유튜브에서 한 번은 봤을, 디자인 설명해주던 그 남자. 당장 옆집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친근한 외모, 서글서글한 말투로 유난히 문짝에 집착하는 장진택은 좀처럼 재는 법이 없다. 무대 위에서 남들을 내려다보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객석으로 내려와 광대를 자처할 정도로 대중과 소통함에 있어 스스럼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짝 장인’의 본질을 잊고 있었다. 기자로서의 저널리즘을 이야기할 때 그의 눈이 가장 반짝였음을. 그 순간 자동차 회사의 압력에도 올곧게 자신의 길을 가는 남자 장진택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기아자동차 디자이너 출신의 자동차 기자, 언론사 대표 겸 편집장, 그리고 지금은 자칭 유튜버 꿈나무. 분명 평범한 이력은 아니다. 디자이너였는데 갑자기 기자가 된 계기가 있나. 회의를 느껴서 업종을 바꿨다거나.
순서가 반대다. 원래 미술에 관심도 없는, 준비물 안 가져가서 미술 시간에 벌만 서던 학생이었다. 그런 내가 재수하면서 미술을 시작해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이너로 자동차의 꿈을 이룰 줄은 몰랐지. 어쨌든, 그때는 홍대 디자인과 학생들이 부족해서 오히려 기업이 디자이너를 못 뽑던 시절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현대·기아 자동차 입사가 어느 정도 예정돼 있었는데, 내가 4학년 때 딱 IMF가 터졌다. 결국 그해 현대·기아 자동차 신입 디자이너 채용이 전면 무산됐다.
근데 마침 그 시기에 내가 애독하던 모 자동차 잡지에 독자 선물이 당첨돼 상품 수령하러 잡지사로 직접 간 적이 있었다. 거기 갔다가 기자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얼떨결에 기자 일을 시작하게 된 거다. 카미디어 때 맥가이버 시승기를 진행했던 성우 배한성 선생님도 거기서 처음 만났다. 기아 자동차 디자이너로 입사한 건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대기업 자동차 디자이너로서의 회의감이 업종 전환의 계기가 된 건 아닌가 보군.
회의감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아침 6시 30분에 출근해서 밤 10시 넘어 퇴근하곤 했다. 업무도 어느 날 갑자기 “룸램프 500장 그려 와라” 같은 식으로 오더가 내려온다. 그러면 나는 “이게 어디에 들어가고 또 누구를 타깃으로 하는지, 디렉션이 뭔지”라고 묻곤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디자이너가 그거 알아서 뭐 하게?”였다. 그냥 500장이라는 개수를 채우기 위한 디자인을 했던 거다. 하지만 이게 이유는 아니고, 아버지 병환 때문에 관둔 거다. 원래는 휴직 신청을 하려고 했는데 3년차 이하는 휴직이 안 된다고 해서.
그런데 디자이너 출신이면서 기자가 된 것도 재미있다. 거쳐 간 경력도 월간디자인, 모터트렌드, GQ 등 화려하고. 글도 잘 쓰는데 취재력까지 좋은 걸 보면 기자가 천직 같은데.
나는 잡지에서 트레이닝된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가진 기자로서의 저널리즘은 모두 GQ에서 편집차장을 지내던 시절에 배우고 습득한 방식이다. 기자는 항상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고.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니 대부분 매체가 언론이라기보다 거의 마케팅 매체에 가까웠다.
친한 동료 기자들과 항상 저널리즘 이야기를 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게 되나 봐라”라며 잘라 말하더라. 그때마다 오기로 했던 말이 “그럼 내가 가능하다는 걸 증명해볼게”였다. 그 뒤로 문화관광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2급으로 있다가, 정치판 같은 업무에 질려 그동안 가슴 속에 품어왔던 저널리즘을 펼쳐보자는 뜻으로 시작한 게 ‘카미디어’였다.
처음부터 영상에 본인이 출연한 건 아니었다. 초기에는 성우 배한성 씨가 출연하는 ‘맥가이버 시승기’가 주요 콘텐츠였다.
내 얼굴을 들이밀면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겠나. 대신 내가 대본을 쓰고 배한성 선생님이 출연하시니 그림이 좋았다. 자동차 업계 반응도 꽤 좋았는데, <카미디어>를 모 그룹에 매각하면서 딱 끊기게 됐다. 당시 회사 자금담당 임원이 배한성 선생님께 출연료를 그렇게 많이 줘야 하냐며 불편해 했다. (사실, <카미디어>를 나 혼자 꾸려갈 때 배한성 선생님은 출연료를 받지 않으셨다. 하도 안 받으셔서 가방에 몰래 돈봉투를 넣어두면 그 날 밤 전화로 호통을 치시기도 했다)
배한성 선생님 출연이 어려워지다 보니 내가 직접 출연하게 됐다. 처음엔 많이 버벅거렸는데, 차차 적응되더라. 지면의 기자와 달리 영상에서는 내가 무대에 올라가서 고개 빳빳하게 들고 누굴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다. 시청자와 동등한 높이에서 서로 소통하면서 나도 광대가 되어야 한다. 그 광대 같은 재능이 없기 때문에 문짝에 집착하는 거고(웃음). 그리고 저널리즘 때문에 여기저기 물의도 많이 일으켰다.
독자들에게 물의를 일으킨 건 아닐 테고, 자동차 회사였겠지?
자동차 회사(제조사 및 수입사)도 그렇지만 사실 기자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보통 안 팔리는 재고차들이 쌓일 때쯤 되면 자동차 회사가 우호적인 매체에 연락해 시승기를 부탁한다. ‘이 차가 왜 지금껏 조명되지 않았을까?’ 같은 기사가 나오는 식이지. 이거야 뭐 마케팅 활동이니 이해할 수는 있는데, 여기에 거짓 정보가 들어가면 문제가 된다.
여튼 돈 받고 기사 써 주는 게 없지 않다. 이런 걸 하지 않으면, 매체 운영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나도 이런 변화에 어느 정도 따르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심해지더라. 그러다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기자로 살아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렸다. “똑똑하고 따끔한 기사 쓰면서도 돈 벌 수 있다”라는 걸 보여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똑똑하고 따끔한 기사 쓰면서도 돈 벌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의 장진택을 만들어준 유명한 결함 고발 취재들이 다 그 시기에 터지지 않았나. 아이오닉 언덕 출발 시 가속페달 먹통 결함이나 K7 세타2 엔진 리콜 같은 영상들 말이다.
그 영상은 올리기도 전에 사실 확인 차 해당 회사 측에 먼저 연락을 했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마음대로 해라”였다. 오히려 내가 광고를 받으려고 이러는 것처럼 오해하는 분위기가 기분 나쁘기도 했다. 영상은 시청자들이 판단할 거라면서. 그러기에 나도 쿨하게 올린 거다. 업로드 첫째 날 조회수가 3천이었는데, 다음날 40만을 찍더니 해당 회사에서 바로 연락이 왔다. 심지어 직원 두 명이 제주도 취재 현장까지 비행기 타고 와서 영상을 좀 내려달라고 하길래 “영상 내릴 줄 모른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소위 ‘장진상’이라는 별명이 나온 건가. 자동차 회사, 매체들 사이에서도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을 것 같은데.
그 사건 이후로 해당 회사에서 자꾸 불이익을 주려고 했다. 취재 협조를 회피하고, 신차발표 현장에서 질문도 안 받았다. 맨 앞에서 높이 손을 들어도 티가 날 정도로 질문을 안 받아줬다. 덕분에 2017년 모닝 신차 발표회 때 내 질문을 묵살하던 현장을 그대로 담은 영상이 멋지게 하나 나왔다.
듣기로는 그 영상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당시 나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홍보담당 임원이 갑자기 사직했다. 다행히 이후 해당 홍보팀과 잘 지내고 있다. 취재 협조도 잘 해 준다.
그런데 그렇게 잘 성장한 카미디어였지만, 현재 모회사와 법적 소송 진행 중이다. 어차피 개인 SNS를 통해 팩트와 진행 상황을 모두 공개했으니 말은 조금 아낄까 한다. 어쨌든, 모든 것을 바쳐온 카미디어를 하루아침에 잃고 상실감도 컸을 것 같은데.
상실감도 상실감이지만, 여태까지 나름 똘똘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이런 일을 당하다니’, 충격이 엄청났지. 물론 그 후에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들어왔고, 나도 이제는 모든 걸 접고 가족을 위해 산업의 부품으로 살아야겠다는 마음도 먹었다. 거액의 연봉을 준다는 곳도 있었는데, 결국 내가 생각했던 팀의 구성과 사이즈가 맞지 않아 고사하긴 했지만.
그래도 불쌍한 신세가 된 대신, 응원과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신 분들이 너무 많다. 만약 내가 돈을 버는 데만 혈안이 됐다면 지금의 고마운 분들이 있었겠나. ‘그래도 이거 하나는 얻었구나, 충분하다’ 싶었다. 이미 내가 벌여놓은 게 너무 많다 보니 힘내서 다시 뛸 수밖에 없다. ‘미디어오토’도 그렇게 시작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정말 고마운 사람들의 응원밖에 없다.
아까도 잠깐 언급했지만, 팬들이 장진택에게 붙여준 유명한 별명이 하나 있다. 바로 ‘문짝 장인’. 유튜브 영상이나 시승기를 보면 매번 문짝 이야기가 나온다. 왜 이토록 문짝에 집착하나.
겉에서 보면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문을 여는 순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문짝이다. 열어서 보기만 해도 가장 손쉽게 파악할 수 있고, 이것만으로도 차의 만듦새에 대한 견적이 어느 정도 나온다. 사실 이건 자동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기본이다. 그동안 다른 매체에서 아무도 안하던 걸 내가 그저 해본 것뿐이지. 다행히 계속 하다 보니 내가 디자이너라는 사실과 결부되며 그게 트레이드마크이자 재미 요소로까지 발전한 것 같다.
스타일링보다는 품질을 높이는 디자이너, 사용성을 높이는 디자이너, 콘셉트를 만드는 인문학 디자이너들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다.
자신이 몸담았던 현대·기아 자동차는 어떻게 보고 있나. 최근 굉장히 공격적으로 디자이너들을 영입하고 있는데.
물론 아까는 ‘룸램프만 500장 그렸다’ 이런 이야기도 했지만, 지금의 현대·기아는 전 세계 디자이너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회사 중 하나다. 2006년 기아에 피터 슈라이어가 부임하면서 디자이너가 책임감을 갖고 차를 만들 수 있는 좋은 문화를 만들었다.
문제는 앞으로 자동차 디자인에서 스타일링이 점점 무의미해진다는 점이다. 소유의 개념이 점차 사라지고, 사람들도 취향보다는 쓰임새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차를 고르는 시대다. 자연히 스타일링보다는 품질을 높이는 디자이너, 사용성을 높이는 디자이너, 콘셉트를 만드는 인문학 디자이너들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미 자동차 업계의 흐름도 인문학적인 접근의 디자인으로 가는 상황에서 자꾸 스타일링을 강조하려는 시도는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부분에서는 어떤 브랜드가 좋다고 보나. 장진택 기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이야기해본다면.
국내에서 구매 가능한 차 중에서는 볼보가 제일 잘 하고 있다고 본다. 애써 꾸미지 않아도 요란하지 않으면서 멋이 있다. 거기에 스토리텔링도 탄탄하다. 아, 지금 있는 볼보 XC60은 패밀리카로 와이프가 타고 있고, 나는 1991년식 벤츠 190E랑 2003년식 사브 9-3 같은 올드카를 타고 있긴 하지만.
아까 사진 촬영하면서 잘 봤다. 관리 상태가 어마어마하더라. 원래부터 올드카를 좋아했나.
전혀. 그전에는 ‘차는 무조건 신차’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나 말고 배한성 선생님이 올드카 마니아셨지. 당시만 해도 속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배선생님이 구입하기로 한 벤츠 190E 매물을 같이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차를 직접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날 데리고 매장 가서 계약서까지 쓰고 시승도 몇 번 씩이나 했는데, 결국 어머니 반대로 계약금만 날리고 포기했던 그 차가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외장, 시트 색깔까지 똑같더라. 선생님께 이 차 제가 사겠다고 부탁했다.
배한성 선생님이 순순히 내어주셨나.
그럴 리가 있나. “6개월 동안 전 차주를 끈질기게 회유해서 겨우 구입한 건데 어떻게 네가 가져가느냐”고 하셨지. 그런데 이 차는 보는 순간 무조건 내가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190E를 포기하셨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으셨는지 항상 매장 앞을 지나갈 때마다 계속 구경하고 또 시승도 하시곤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너무 많이 났다.
배선생님도 이 이야기를 듣고 하루를 내내 고민하시더니, “나의 구매 이유보다 너의 감성이 훨씬 더 값어치가 있구나. 스토리가 있는 너를 내가 어떻게 이기겠냐”라며 순순히 내어주셨다. 대신 내가 하는 것보다 더 완벽하게 관리해야 한다며 신신당부 하셨다.
괜히 내 마음도 뭉클하다. 결국 오늘날의 ‘문짝 장인’ 장진택을 만든 게 아버지인 셈이다.
당시 기업 고위 임원들이나 타고 다니던 피아트를 해태제과 과장인 아버지가 타고 다닐 정도로 차를 좋아하는 분이셨으니 그럴 수밖에. 지금도 나는 차를 너무 좋아해서 언젠가는 세차장을 하나 차리지 않을까 싶다. 기자 일을 하면 가끔 잔머리를 굴리거나 신념을 망가뜨리는 일도 생기는데, 땀 흘려 노동으로 돈을 버는 것만큼 깔끔한 게 또 없다. 안 배워도 이 정도로 닦을 수 있는 내가 만약 제대로 배워서 닦으면 대박이 나지 않을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