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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바다, 나의 사막
2024-04-23T14:15:57+09:00

서른을 맞이하는 나의 자세는 사하라였다.

기도 시각을 알리는 아잔이 울리면 신께 무릎을 꿇는 나라, 미로처럼 헤어 나올 수 없는 골목을 가진 나라, 11월 한낮의 내리쬐는 볕에도 내복을 입는 나라, 과거 메르스를 퍼트렸다는 오명을 입은 낙타들이 사는 나라, 뜨겁게 달아오른 모래알이 낙타의 발자국을 끝내 바람에 흘려보내는 나라,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시한부의 별똥별들이 수없이 지나는 나라, 바다 아닌 사막이 눈 속에 차오르는 붉은 모래의 나라가 모로코다.

스물아홉쯤이 되면 꽤 멋진 어른이 돼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는 다 자라버린 삼십 대의 문턱에서 사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살았다. 취미는 취직, 특기는 사표. 경력이란 것을 쌓아 올리는 이십 대를 어떤 핑계를 대며 회사를 그만둘까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채웠다. 날이 좋아서, 추워서, 나쁜 말 때문에, 그래서 인간이란 존재가 징글징글해져서, 결국엔 행인 1, 2, 3까지 꼴 보기 싫어져서. 괜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내밀며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서른이라는 나이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방만했고, 어디론가 떠날 궁리만 했던 그리고 몹시 서늘했던 20대와 찐한 고별식을 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대충 한 발만 담그고 살았던 지금을 청산할 곳이 사막이면 좋을 거 같았다. 이유는 사막이라면 30대가 오기 전 모래뿐인 그곳에서 죄책감 없이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을 거 같아서다. 사실 반성과 다짐도 떠나기 위한 구실일 뿐이었다. <사표>라는 제목의 책을 안고 자며 아빠에게 넌지시 암시를 주고, 텅 빈 눈으로 부장님께 사표를 내밀었다.

내일 자 모로코행 비행기를 끊었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고민과 게으름이 만나 대책 없음의 시너지를 발휘하는 순간, 그래도 밤 비행기니까 하루의 시간은 있었다. 사실 하루면 충분했다. 짐은 대충 꾸리면 되고, 꾸리다 기억 속에서 유실된 물건은 가서 사면되고, 못내 구하지 못해 불편한 일이 발생하면 며칠 후면 끝날 이 걸리적거림 정도야 그냥 참으면 된다. 숙소는 뜨거운 물이 잘 나온다는 곳을 골라 예약 메시지를 보내면 되고, 만약 만실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가서 생각하면 준비 끝. 아니 마지막 절차가 남았다. 엄마, 나 내일 모로코 다녀올게.

며칠이나 간다고, 쓸데없이 애틋해지지 말자는 나의 만류에도 퇴근 후 공항으로 배웅을 나온 친구와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눴다. 친구가 쥐여준 호신 기구에 한바탕 웃고, 곱게 포장된 상비약을 받으며 뭉클해진 마음은 모로코 아르간 오일로 갚겠다고 말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 비행기에 올랐다.

여정은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해 모로코 카사블랑카로 입국, 카사블랑카에서 기차로 메크네스로 이동 후, 야간버스를 타고 사하라 사막에 닿을 수 있는 메르주가로 이어진다. 몰라서 그랬다. 몸 한번 눕히지 못하는 이 일정이 얼마나 무모하고, 허리에게 무례한 짓이었는지를. 양심의 각도로 앉아 몇 시간을 흘러왔는지 세다가, 피곤해서 그만뒀다. 변변한 가이드북도 없이 수첩에 적힌 낯선 지명들을, 더듬더듬 만져가며 길을 나섰다.

몇 개의 국경을 넘고, 시간의 경계를 넘어뜨리며 모로코 모하메드 V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유심을 사야 했다. 어디를 가던, 내 몸 챙기기 전에 생사를 알려야 하는 이 아이러니. 어렵지 않게 유심 스토어를 발견했다. 30디르함이 정가라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 들어야 영어인 줄 아는 나의 개량된 언어가 우스워 보였는지, 무려 3배가 넘는 100디르함을 요구했다. 

나와 실랑이를 벌이는 판매원의 등 뒤에 다른 직원이 합세해 역정을 냈다. 하지만 이전 나라를 여행하며 이미 갖은 사기에는 이골이 난 상태였다. 사기도 계속 당하면 익숙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40에 해줘. 안 돼, 안 팔아. 그럼 50에 해줘. 그래. 정가보다 비싸게 샀지만 싸게 산 것만 같은 이상한 쾌감, 억울함보다 단련된 사기 내공에 흡족함이 앞선 더 이상한 감정에 헛웃음이 났다. 애처롭게 유심을 끼고 메크네스로 향하는 기차표를 사러 갔다. 다행히 쉽게 매진이 된다는 일등석 표를 구했다.

이렇게 여정은 다시 시작됐다. 일등석은 6명이 탈 수 있는 방으로, 세 명씩 마주 보고 앉는 나름 쾌적하고 어색한 구조다. 어둠 속을 내달리는 기차 안, 국적도 차림새도 다른 여섯 명의 사람이 그 시간 같은 공간에 멎었다. 각자의 시간 속에 살던 이들이 한 곳에서 만나 낯설고 어색한 공기를 누르며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연과 우연이란 건 알수록 기이하다.

기차의 꼬리가 메크네스역에 다다랐다. 나는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야간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저녁 9시 30분 출발한 버스는 새벽 5시가 되어서야 메르주가에 도착했다. 어느 정류장에 내려야 할지 알 길은 없었다. 곤히 자고 있으면 숙소 직원이 버스에 올라 손님을 끌고 내려준다는 글을 보았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역시 그들은 나를 귀신같이 발견해 냈고, 나는 내릴 준비를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포장도로 위에서 미끄러지는 캐리어 소리만이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듯, 피곤함이 밀려와 몽롱했다. 직원의 뒤를 쫓으며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에는 수만 개의 별이 들어차 있었다. 그 새벽하늘은 내가 모로코에 와야만 했던 모든 이유였고 이곳에서 나를 기다려준 밤, 어둠을 위로하고 나를 환대해 준 따뜻한 기억이다.

아침이 밝았다. 조식을 먹으러 갔다. 몇 개의 빵과 커피를 접시에 담아 들고 식당을 나왔다. 모래 둔덕 보이는 테라스에 앉았다. 눈앞에 사하라 사막이 있었다. 이 황홀한 고백을 찍어 한국으로 전송하던 차, 소란이 일었고 어제 떠났던 투어 팀이 무사 귀환을 알렸다. 사막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러 갔다. 온몸에 여독이 한가득인 나는 오후에 사막으로 들어갈 거라고 말했다. 그들은 단호한 고갯짓으로 사막에 들어가서 쉬면 된다고 짐을 챙기라며 채근했다. 11월 사막의 밤은 지독히 춥다는 말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짐을 꾸렸다. 숙소에서 얼마의 돈을 내고 사막룩도 빌려 입었다. 나와 1박 2일 여정에 함께 할 친구들은 이름이 너무도 예뻤던 커플이다. 일단 사과했다. 합석해서 미안하다고. 같이 가게 돼서 좋다는 그녀의 말을 믿기로 했다. 숙소를 나서니 낙타 세 마리가 쪼르륵 앉아 우리를 맞이했다. 낙타를 몰아주는 알리가 우리를 조심히 앉히고 천천히 걸음을 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