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렉스. 이 세 글자는 많은 의미를 대변한다. 고가, 럭셔리, 그리고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퀄리티. 현재 롤렉스의 스테인리스스틸 스포츠 워치들은 불티나게 팔리며, 웨이팅 리스트를 거쳐야만 고객의 손목에 안착할 수 있다. 왕관 모양 로고만 갖다 붙이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롤렉스, 이 브랜드가 만들어 내는 시계 중 인기가 없는 제품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예외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모델이 있었으니, 바로 롤렉스 밀가우스다.
데이토나, 서브마리너가 두터운 팬층을 형성했듯이, 밀가우스에 대한 의견도 분분한데, 대부분은 ‘극혐’한다는 쪽. 소비자들의 반응과 중고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대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밀가우스는 다른 롤렉스 모델들보다 비교적 인기가 없다. 찬밥 신세가 된 이유는 뭘까.
롤렉스 제품군의 장점은 모두 시계의 역할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물속에 들어가 잠수를 한다면, 서브마리너를 차면 된다. 더 깊은 바닷속 탐험을 원한다면 딥씨가 답이다. 차를 좋아하고 레이싱을 즐기는 이에게는 데이토나가 제격.
사실 밀가우스도 역할은 분명하다. 자기유도의 단위인 가우스라는 명칭에서 유추해 낼 수도 있겠다만, 이 시계는 엔지니어를 위해 탄생했다. 1954년, 특히 전자기장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고 1,000가우스를 견뎌내며 꿋꿋이 시간을 알려 줘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는 제네바에 있는 유럽 핵입자물리학연구소 CERN의 과학자들이 즐겨 찼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시계이기도 하다. 자기장으로부터 내부 부품들을 보호하면서 무브먼트에 최소로 영향을 주는 밀가우스는 과학자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시계처럼 보였다.
하지만 과학자들 앞에 더욱 정확하고 기능도 많아진 전자시계, 스마트워치 등이 즐비하게 놓여있는 지금, 밀가우스는 설 자리가 없어졌다. 다이빙 또는 레이싱처럼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도 못한다. 과학자들을 위한 시계라는 역할이 그리 섹시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말이다. 왠지 와이셔츠 가슴 포켓에 색색별로 펜을 꽂고 흘러내리는 두꺼운 안경을 추어올리며, 손목에는 밀가우스를 차고 있는 그 모습, 까리함 보다는 너무 딱딱하거나 고리타분해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
이번에는 기능과 역할에서 잠시 비켜나 과연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 만한 디자인인지 살펴보자. 정제되고 단정한 기존 롤렉스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밀가우스는 외형도 독특하다. 초침은 요란한 오렌지색이고, 모양도 번개처럼 생겼다. 이는 전자기장을 기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른 요소들은 오이스터 퍼페츄얼과 흡사하다.
마치 멀끔한 정장을 입을 신사가 피에로의 넥타이를 목에 멘 것 같다. 안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 점입가경으로 녹색 빛을 띠는 크리스털은 이상야릇한 화려함을 더해준다. 종합해본 결과,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특이하게도 빈티지 밀가우스는 롤렉스 컬렉터들 사이에서 레어템이자 꽤 가치 있는 아이템이 되었다. 그 당시에도 판매량이 많지 않아 희소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 밀가우스들은 모양새도 단정하고 정갈해 두루 사랑받을 만했지만, 그때에도 롤렉스계의 이단아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최악의 롤렉스를 사랑하고, 몇 개 없는 시계 컬렉션의 한자리를 내어주게 되었을까?
우선 내 시계 컬렉션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필자는 인생에서 의미 있는 순간이 왔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계를 산다. 일종의 훈장 같은 셈이다. 그래서 시계를 사고, 팔고 반복하는 덕후들에 비해 나는 소장한 아이템들을 오래 간직하는 편이다.
아직은 삶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순간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인지 내 시계 컬렉션은 그리 다채롭지는 않다. 그런데도 많은 선택지 중 내가 밀가우스를 컬렉션 중 두 번째로 구매하고, 드림 워치 리스트 상위에 이름을 올렸던 이유는 바로 디자인 때문이다. 비인기 모델이라 매장에서 바로 구매가 가능했다는 점도 한몫하지만.
다이얼은 당연히 블루. 롤렉스는 이를 ‘Z-blue’라고 부른다. 녹색 크리스털 아래에 푸른빛을 내는 다이얼과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현란한 오렌지색, 하지만 이를 감싸고 있는 건 평범해 보이는 케이스와 베젤이다. 이 이상한 구색이 마치 로맨틱 코미디의 황태자 휴 그랜트 같다.
핸섬하고 댄디한 외모와는 달리 드라이한 위트와 유머 코드를 가진 그. 롤렉스 밀가우스도 나에게 이런 반전매력으로 성큼 다가왔다. 과학자들을 위한 시계였지만 지금은 쓸모없다는 점도 나를 웃게 만든다. 마치 한물 지나간 아재 개그처럼 말이다. 웃고 싶지 않고, 웃지 않아야 하지만 왠지 모르게 피식하게 하는 그런 코드다.
이 시계의 매력을 아는 소수 마니아층을 만났을 때는 머나먼 타지에서 고향 친구와 조우한 것 같이 반갑다. 물론 대화의 대부분은 이 시계의 매력을 몰라줘서 속상하다는 넋두리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말이다.
아직은 이 시계를 내 컬렉션에서 보내줄 생각은 없다. 물론 이 시계에 훈장처럼 새겨진 의미도 중요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밀가우스의 모든 면면을 사랑한다. 다른 이들이 단점으로 꼽는 부분까지도. 누군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Edited by 정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