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독보적인 정체성, 그리고 특유의 아름다운 실루엣과 높은 퀄리티의 소재로 자동차 팬들의 심장을 뛰게 하는 바로 그 브랜드. 그리 겸손하지만은 않은 포르쉐(Porsche)는 모터가 달린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살아있는 전설, 페르디난트 포르쉐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마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그래픽 소설 속 영웅처럼 이름부터 비범하다. 실제로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그보다 더한 문화적 명망을 가진 공학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전쟁의 거래와 야망을 통해 얼룩진 제국을 세웠다. 전지전능한 포르쉐의 아버지이자 공학 천재인 그는 자동차의 디자인을 바꿔놓았으며, 한 세기가 넘도록 높은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 군림하는 자동차 브랜드들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포르쉐의 아버지이자 공학 천재인 그는 자동차의 디자인을 바꿔놓았으며, 높은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 군림하는 자동차 브랜드들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포르쉐는 한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동차와 동시에 세상에 왔다.” 실제로 그는 아메데 볼레가 르망(Le Mans)에서 증기기관 자동차를 공개하고 2년 후인 1875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자동차들을 예전 모습으로 돌려주는 판금공이었으며, 포르쉐는 13세 때부터 집과 사업장에 전기를 설치할 정도로 기계적인 영역에서 천재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31년, 포르쉐는 그의 첫 번째 회사를 세웠다. 사실 이때는 자동차 제작이 아닌, 다른 제조사들이 그들의 모델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컨설팅을 해주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곧 포르쉐는 ‘대중의 자동차’를 목표로 내건 독일 정부의 요청에 응했고, 폭스바겐의 그 유명한 비틀로 화답했다. 사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 비틀은 이후 1939년산 포르쉐 64에 영감을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었다. 3대만 생산된 포르쉐 64 중 마지막 한 대는 2019년 경매에서 –모두가 예측한 대로- 2천만 달러가 넘는 가격에 판매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자동차 제조도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닌, 군사적인 용도로 탈바꿈한다 .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자동차 제조도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닌, 군사적인 용도로 탈바꿈한다. 이때 포르쉐는 문제가 있는 자동차 디자인이라 여겼던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휘발유와 전기가 합쳐진 하이브리드 구동 방식이 탄생했고, 1902년 오스트리아 엑셀버그 힐클라임에서 기록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이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곧 포르쉐의 제품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군 양쪽에서 모두 사용되기 시작한다.
포르쉐는 폭스바겐의 이름 아래 여러 대의 탱크를 장악했다. 4기통 엔진은 파시발 비행선을 작동시켰고, 포르쉐는 엘리펀트, 타이거, 마우스를 비롯한 여러 중전차의 설계를 도왔다. 군은 업그레이드된 버전의 폭스바겐 비틀 여러 대를 오프로드에서 사용했다.
포르쉐 전기를 쓴 파비안 뮬러 작가에 따르면, 독일이 점령했던 폴란드 내의 포르쉐 계열 공장 중 적어도 한 곳에서는 노동자들이 노동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매우 적은 임금을 받았으며, 유대인들이 다윗의 노란 별을 달고 다녀야 했던 것처럼 폴란드를 뜻하는 ‘P’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P를 달고 있는 이들은 일하지 않을 때도 극장 같은 곳부터 심지어는 방공호 출입조차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어떤 노동자들은 폭탄을 만들도록 강요당하고, 쥐가 들끓는 더러운 건물에서 살아야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1945년, 독일은 무너졌고,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KdF-Stadt 폭스바겐 공장을 손에 쥐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폭스바겐 이사회 의장직에서 쫓겨나 전쟁 범죄로 체포되었고, 결국 열리지 않았던 재판을 기다리며 20개월의 수감 생활을 했다. 그러나 전시 노동 관행 조사에 철저히 임했던 폭스바겐과 달리, 포르쉐는 그들의 행적에 대해 충분히 논한 적이 없다. 실제로 포르쉐는 강제노동자의 수를 적극적으로 축소했지만, 이는 그들 자신의 문서와 목격자들의 진술 덕분에 반증으로 작용할 뿐이었다.
일단 역사학자들은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얼마나 나치에 관여했는가에 대해 각기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일각에서는 포르쉐를 두고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피해받은 사람들은 뒷전이고, 그 대신 본인의 이름을 높이면서 더 나은 자동차 기술을 발견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 부당이득자라고 묘사한다.
어느 쪽이 되었건, 결국 이 모든 지저분한 과거는 포르쉐의 유산에 영원히 따라붙을 추악한 꼬리표로 남았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은 포르쉐가 나치 유니폼과 경례를 생략했고,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측근인 홀로코스트 건축가 하인리히 히믈러가 수여한 SS계급 및 여러 전리품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으며, 정치적 격동의 시기에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건, 결국 이 모든 지저분한 과거는 포르쉐의 유산에 영원히 따라붙을 추악한 꼬리표로 남았다.
궤도에 오른 예술
전쟁이 끝나고, ‘페리’라고 불린 페르디난트 포르쉐 주니어는 차세대 스포츠카를 도입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경량 설계로 잘 알려진 스피디한 작은 로켓, 포르쉐 356을 시작으로 포르쉐의 포트폴리오도 점차 그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초기 주행에는 2도어 차종 50대가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하드톱과 오픈톱을 모두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었다.
1953년에는 부정할 수 없는 선천적 레이싱 DNA의 포르쉐 550이 출시됐다. 550의 낮은 차체와 둥근 곡선은 공기역학의 꿈을 현실로 가져온 듯했고, 미드십 엔진의 균형 잡힌 하중 분포와 상대적으로 손쉬운 핸들링이 가능해졌다. 550은 3년 동안 단 90대만 생산됐지만, 이는 레이스카에 있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550은 첫 대회인 뉘르브르크링 아이펠 레이스에서도 우승했으나, 재미있게도 정작 미국 역사에 더 큰 흔적을 남긴 차량은 제임스 딘이 죽을 뻔했던 1955년의 사고에서 몰았던 포르쉐 550 스파이더다.
역사의 중심축은 이제 911로 넘어간다. 두말할 필요 없이, 포르쉐가 만든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모델이다. 911은 1963년 첫 출시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해서 생산된 포르쉐의 아이콘이다. 엔진을 중심으로 주된 변천을 겪으며 개선되어온 911이지만, 그 기본적인 스타일은 대체로 기본을 해치지 않고 유지되었다. 예컨대, 잘 뻗은 프론트 엔드, 짧은 리어, 모델도 질투할만한 실루엣의 매끈한 바디 셸, 그리고 수작업으로 완성한 스티치의 가죽 인테리어와 커스텀 엔진 커버에 이르는 환상적인 디테일이 그렇다.
911은 두말할 필요 없이, 포르쉐가 만든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모델이다.
1996년에는 2인승 미드십 엔진 로스터로 1세대 포르쉐 박스터가 시장에 데뷔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휘청이는 포르쉐에게 접근하는 인수의 손길을 막아준 것이 바로 이 차량이었다고 말한다. 박스터는 1993년 북미 국제 모터쇼에서 이미 대표모델로 엄청난 찬사를 받았고, 그 시작부터 승자가 될 기미를 보였다. 1세대 초기 모델의 엔진 결함도 있었으나(물론 이후 모델들은 결함을 모두 개선하여 출시됐다), 특유의 프론트 윙과 비스듬히 들어간 헤드라이트, 럭셔리한 인테리어를 갖춘 박스터는 즉각적으로 히트를 쳤다.
일가를 이루다
그 어떤 브랜드도 홀로 성공할 수는 없다. 포르쉐도 그렇다. 이들은 수많은 유명 기업과 맺은 장기적인 파트너십 덕에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미쉐린은 포르쉐의 각 모델에 맞게 타이어를 조정해서 제작한다. 이는 도심과 트랙의 구분 없이 놀라운 핸들링과 매끄러운 주행 퍼포먼스를 가능케 했다.
미쉐린은 포르쉐의 각 모델에 맞게 타이어를 조정해서 제작한다.
또한 포르쉐는 1996년부터 공장에서 생산된 차량에 Mobile 1의 엔진오일을 채워 넣었다. 합성 엔진오일의 선구자이자, Mobile 1의 모회사인 엑손모빌은 신기술을 만들고 발전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이들의 오일은 동네 구멍가게에서 훔쳐 온 구식 타르와는 차원이 다르다. 여러 화학자와 엔지니어로 구성된 팀은 품질과 혁신을 향한 자신들의 열정과 함께 포르쉐를 비롯한 여러 고객사가 같은 길을 걷도록 인도하며, 자동차가 가진 최고의 성능을 낼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테스트한다.
포르쉐에 앉는 순간 연결되는 것들
오늘날 포르쉐에 오른다는 것은 그들의 장대하고 유구한 역사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젊은 엔지니어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1900년 세계 박람회에서 처음으로 휠 허브 엔진을 선보였던 그 순간까지 말이다. 포르쉐의 가장 유명한 차들은 모두 여러 반복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이는 제대로 된 차를 만들기 위한 포르쉐의 끝없는 열정의 증거이기도 하다.
페르디난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직한 조화를 이룬 제품은 별다른 장식이 필요 없다.” “순수한 형태 그 자체로 끌어 올려져야 한다.” 포르쉐는 허세로 가득 찬 자만이나, 잠깐 반짝이고 끝나버리는 디테일이 아닌, 그들의 순수한 품격 덕에 돋보일 수 있었다. 아주 사소한 디테일조차 제작자에게는 자긍심의, 고객에게는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
페르디난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직한 조화를 이룬 제품은 별다른 장식이 필요 없다.” “순수한 형태 그 자체로 끌어 올려져야 한다.”
자동차 마니아로도 유명한 코미디언 제리 사인펠드는 이런 작은 것들을 중요시한다. “내가 타고 있는 57년식 포르쉐 스피드스터의 도어가 닫히는 모습을 보면, 앉아서 그저 하염없이 달칵거리며 문 닫히는 소리만 계속 듣게 될 것이다. 그래, 바로 그 문짝! 내가 지금 이렇게 있는 이유도 다 이 문짝 때문이다.”
포르쉐를 가진 이들은 그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들은 한 세기를 넘나드는 자동차의 역사와 레이싱의 전설들이 만들어내던 우레와 같은 엔진 소리를 잎이 무성한 교외, 그리고 나무가 늘어선 길 위에 되살려 놓는다. 단지 이동수단이 아닌,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사들이는 것이다. 르망에서 1970년식 911S를 몰았던 스티브 맥퀸 같은 슈퍼스타들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동시에 기능적으로도 훌륭한 자동차에 몸을 싣는 것은 흔한 기회가 아니다.
스티브 맥퀸 같은 슈퍼스타들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동시에 기능적으로도 훌륭한 자동차에 몸을 싣는 것은 흔한 기회가 아니다.
헐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비벌리힐스 포르쉐 마케팅 디렉터인 제이 허프스슈미트는 “포르쉐는 신분의 상징이나, 패션 액세서리가 아닌, 자신들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열심히 달려온 이들을 위한 것이다. 특히 비벌리힐스의 배우, 프로듀서, 증권 중개업자, 변호사처럼 경쟁적이면서도,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나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들 말이다”라고 말했다. 단 한 번의 구매로,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엘리트층에 속할 수 있으며, 누릴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바로 그 주행을 즐길 수 있다.
Edited by 조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