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하면 보통 프랑스와 미국, 호주를 떠올리기 마련. 일본 와인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이제 와인 마니아에게 일본 와인은 더 이상 이국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와인 불모지라 불리던 일본에서 국제 품평회 수상작이 나오고, 프리미엄 시장을 겨냥한 마케팅으로 입지를 차츰 넓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지도는 낮아도 존재감은 선명하게. 일본 와인이 조용히 반전을 쓰고 있다.
일본과 와인
그 낯선 조합
일본은 오랫동안 와인의 중심 무대에서 벗어나 있었다. 유럽의 전통 강자들과, 신대륙의 공격적인 와인 산업 사이에서 일본 와인은 조용할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와인 시상식, 영국 디캔터 월드 와인 어워드(DWWA)에서 산토리의 도미 고슈(登美甲州) 2022가 최고상을 수상한 것. 포도 재배부터 양조까지 100% 일본에서 생산한 와인이 이 상을 받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뿐만이 아니다. 이 외에도 샤토 메르시앙(Château Mercian), 그레이스 와인(Grace Wine) 같은 일본 와이너리들도 국제 대회에서 수상 소식을 전했다. 급기야 홋카이도 요이치 지역의 도멘 타카히코(Domaine Takahiko) 와이너리 와인은 내놓기 무섭게 품절된다. 레스토랑 와인 리스트에 오르는 일본 와인도 점점 늘게 됐다.

그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2024년 기준, 일본 와인 시장은 약 302억 달러 규모. 2033년까지 연평균 5.5% 성장해 488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와이너리 수는 2008년 238개에서 2024년엔 493개까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전국 47개 도도부현 중 46개 지역에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무엇이 이런 반전을 만들었을까? 가장 큰 변화는 방향성이다. 일본 와인은 ‘유럽을 따라가는 와인’에서 ‘일본이기에 가능한 맛’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거에는 프랑스의 방식, 이탈리아의 감각을 그대로 흉내 내려 했다면, 지금은 일본의 기후와 토양, 식문화에 어울리는 자신만의 양조 방식을 찾으려 했다. ‘우리는 일본이니까 일본다운 와인을 만들자’는 생각. 이 전환은 품질과 정체성 모두를 바꿔놓았다.
다시 쓰는 테루아
불리한 땅, 특별한 맛

보통 와인용 포도는 척박한 땅에서 더 깊은 맛을 낸다고 알려져 있다. 생존을 위해 뿌리를 깊이 내린 포도나무는 땅속 미네랄과 수분을 끌어 올리고, 그 강인함은 농축된 풍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일본은 와인 재배에 불리한 나라로 여겨져 왔다. 습한 기후와 비옥한 화산성 토양은 와인용 포도 생산에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되레 강점으로 작용했으니, 척박함 대신 풍부함에서 다른 깊이가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토양은 미생물과 유기물이 풍부하고, 그 속에서 자란 포도는 독특한 감칠맛을 품었다. 은은한 짠맛과 깊이는 서양의 클래식한 와인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다.
이 땅에서 나온 맛은 미묘하고 복합적이다. 일본 와인을 설명할 때 우마미(Umami)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달거나 떫은 맛이 아닌, 복합적이고 은은한 감칠맛. 간장, 생선처럼 섬세한 풍미를 가진 요리와 잘 어울렸다.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다 일본 홋카이도로 건너온 와인메이커 에디엔 드 몽티유는 NHK 인터뷰에서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특별한 짠맛이 있는 와인”이라며 일본산 와인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습한 기후와 비옥한 땅. 그 불리함이 오히려 일본에서만 나올 수 있는 독특한 테루아(Terroir)를 만든 셈이다.
고슈
1300년 된 포도 품종의 재발견

일본 와인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품종이 있다. 바로 고슈(Koshu)다. 야마나시현 고슈시에서 유래한 고슈는 1300년 전부터 재배된 일본의 고유 품종. 맑고 섬세한 산도, 은은한 미네랄리티를 지닌 고슈는 오늘날 일본 양조용 포도의 대표 주자가 됐다.
고슈는 일본 와인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1877년 야마나시에 설립된 다이닛폰 포도주 회사가 고슈 100% 와인을 처음 출시한 게 그 시작. 비록 당시 일본에는 와인 문화가 자리 잡지 못했고, 양소 기술도 미흡해 오래가진 못했지만, 그 시도는 오늘날 일본 와인의 뿌리가 됐다. 150년에 가까운 시간이 일본 와인의 정체성을 다져온 셈이다.
교슈는 최근 기후 변화 시대의 희망 품종으로도 주목받는다. 기온 변화에 무던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기온이 상승하면 포도 당도가 과하게 높아지고, 산미가 줄어들어 와인의 균형이 무너지기 쉽다. 하지만 고슈는 높은 온도에도 당도가 급격히 올라가지 않아, 높은 온도 속에서도 균형 잡힌 와인을 만들 수 있는 품종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돈된 라벨
믿고 마시는 와인
‘일본 와인’ 이름을 거는 건 쉽지 않다. 2015년 일본 정부가 라벨 체계를 새롭게 설계, 명확한 표기 기준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일본 와인이라는 명칭은 100% 일본산 포도로, 일본 안에서 양조, 병입한 와인만 사용할 수 있으며, 수입 원료를 섞은 와인은 그 사실을 라벨에 명확히 써야 한다.
지리적 표시(gi) 제도도 마련됐다. 예를 들어 라벨에 야마나시라는 지명이 적혀 있다면, 해당 지역에서 포도를 수확하고 양조까지 마쳤다는 뜻. 어디서 자랐는지가 와인의 정체성을 결정짓는다는 철학이 반영된 규정이었다.
일본의 각 지역명은 와인의 스타일을 나타내기도 한다. 야마나시는 고슈 포도의 고향이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산지. 나가노는 해발 고도가 높고 일교차가 커, 샤르도네나 메를로 같은 서양 품종에서 뛰어난 품질을 보여준다. 홋카이도는 섬세한 산미와 밸런스를 자랑하며, 야마가타는 과일 왕국이라는 이름답게 향과 과실미가 풍부한 와인으로 주목받는 식이다.
이러한 규정은 단순히 어디서 만들었느냐가 아닌, ‘어디의 와인인가’를 말하기 위한 장치다. 지역의 기후와 토양, 그리고 그 안에서 자란 포도가 빚어낸 맛까지 담아내기 위해서다. 진짜 일본 와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일본은 이제 스스로 기준을 세우기 시작했다.
페어링 하기 좋은 와인
아시안 음식과 찰떡

일본 와인의 감칠맛과 짠맛은 음식과의 조화 속에서 더 분명해진다. 특유의 투명하고 깨끗한 맛이 요리의 풍미를 해치지 않아, 다양한 음식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은 실제 미식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런던의 오마카세 레스토랑 Luna Omakase가 지난 9월 한 달간 일본 와인 페어링 코스를 구성해 선보인 것. 생선이나 조개류, 간장 베이스의 감칠맛 나는 요리와 일본 와인의 조합은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고, 일본 와인이 세계 미식 트렌드 속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와인이 버터, 고기, 크림 중심의 유럽 요리와 잘 어울린다면, 일본 와인은 섬세하고 복합적인 풍미를 가진 아시아 음식과 더 좋은 균형을 이룬다. 맛의 강도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접근이 일본 와인의 정체성이다.

일식의 세계화도 일본 와인의 확산을 뒷받침한다. 2013년 일식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일본 요리가 보다 널리 확산된바. 세계인의 시선이 일본산 와인으로 향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향후 10년, 국제 와인 시장에서 일본 와인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지금 눈여겨볼 일본 와인 리스트
일본 와인의 가능성을 세계에 알린 상징적인 와인. 디캔터 월드 와인 어워드(DWWA) 최고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귤과 복숭아 향이 부드럽게 감돌며, 맑고 섬세한 산미와 은은한 감칠맛이 조화를 이룬다.
출고량 단 1,100병. 정교하게 구성된 코스 요리에 페어링되며, 고급 식문화의 일부로 어울리는 장면을 보여줬다. 섬세한 꽃향기와 미네랄리티, 여운을 남기는 산미가 돋보인다.
해발 약 450 m 구릉에서 자란 고슈 포도로 만든 프리미엄 화이트. 노란 복숭아와 배, 황금사과 향이 은은히 퍼지고, 클로브, 화이트페퍼의 스파이시함이 뒤따르며 깊이 있는 여운을 남긴다.
일본 와인의 섬세한 매력을 잘 보여주는 와인. 배와 복숭아, 이국적인 핵과류의 아로마가 어우러져 풍부한 향을 내며, 은은한 산미와 균형 잡힌 구조가 긴 여운을 남긴다.
오로지 피노 누아 하나만을 고집하며, 일본 내추럴 와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홋카이도 고유의 서늘한 기후와 토양이 만들어낸 섬세한 개성이 특징. 지금 일본에서 가장 구하기 어려운 와인 중 하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