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술과 멀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초록병보다는 논알코올을 찾고, 술자리 대신 러닝 모임에 참석한다. 수많은 주류 기업이 몸을 사리며 숨을 고르는 지금, 세상의 흐름과 정반대 방향으로 노를 젓는 이가 있다. 독립출판사 알코올 플레져(Alcohol Pleasure)의 송영웅 대표다.
알코올 플레져가 다루는 주제는 단 하나, ‘술’이다. 술을 소재로 한 책은 서점에 즐비하지만, 술만을 오롯이 다루는 출판사는 이곳만이 유일하다. 대중이 술과 거리두기를 하는 요즈음의 분위기를 오히려 반긴다는 송영웅 대표는 어떤 시간을 지나 독립출판에 몸담게 되었을까?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술이 글로 변모하는 곳
음주 생활에 한 끗을 더하다
알코올 플레져는 이름 그대로 술이 선사하는 기쁨을 책이라는 매개로 전달한다. 지금까지 세상에 선보인 책은 총 세 권. 기획부터 집필, 인쇄와 판매에 이르기까지 출판과 관련한 모든 과정은 그의 손을 거친다. 단편적으로는 다소 영세한 1인 출판사에 불과해 보이지만, 일궈낸 성과는 그 이상으로 비범하다. 예스24의 제안으로 새로운 형태의 전자책을 선보이는가 하면, 출판사로서는 최초로 주류 박람회에 참가해 부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단순히 단일 소재만을 다룬다는 특징 하나만으로 주목받은 건 아니다. 독창적인 시각으로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지점을 날카롭게 포착해 내는 기획력, 그것이야말로 알코올 플레져가 지닌 확고한 강점이다. 맥주 중에서도 캔맥주라는 카테고리를 집요하게 파고든 <캔맥주책>이 그랬고, 안주보다 음악, 영화, 날씨 같은 일상의 요소를 위스키와 연결한 <페어링 에브리띵>이 그랬다. 전 세계 각지에서의 음주 경험을 담은 <알코올 트래블러> 또한 마찬가지다.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오리지널한 콘텐츠를 만드는 데 가장 신경 쓰고 있어요. 그러려면 콘셉트가 확실해야 하죠. 저도 서점이든 어디든, 콘셉트가 분명하지 않은 공간에 가면 그 안에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색다르고 뚜렷한 관점이 있어야 경쟁력도 생기고, 그 안에서 깊이도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알코올 플레져가 선택한 다음 주제는 ‘잔’이다. 출간을 앞둔 <술의 모양>은 술을 담는 기물을 전문 서적에 버금가는 깊이로 다룰 예정이다. 지금까지의 작업이 입문자를 위한 내용에 가까웠던 것과는 또 다른 방향이다. 그는 술이 낯선 사람뿐만 아니라 애호가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책을 만들고자 했다. 이는 향후 양조장과의 협업 등 영역을 넓혀가기 위한 기반이기도 하다.

신간의 흥미로운 지점은 지식이 종이 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송 대표는 국내 양조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수를 온전히 담아낼 전용 잔이 부재하다는 사실이 내심 아쉬웠다. 그 마음이 결국 직접 잔을 만드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현재 그는 블로잉 전문가와 협업하며 직접 전통주 노징 글라스를 제작하고 있다. 프로토타입을 거쳐 최적의 형태로 완성될 이 글라스는, 알코올 플레져가 추구하는 ‘즐거운 음주’를 구체화한 결과물인 셈. 문장에서 시작된 그들의 감각은 잔이라는 물성을 입고 천천히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 준비를 하고 있다.
회사원에서 출판사 대표로
제주도에 터전을 잡다
그는 왜 멀쩡하게 다니던 광고 회사를 그만두고 출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까? 평생을 바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한 광고업이었지만, 막상 회사에서 마주한 현실은 그 열정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실망스러웠다. 특히 스승처럼 존경하던 선배들이 부어라 마셔라 식의 술자리에서 흐트러지는 모습은 그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지금에야 오래 근속을 지켜낸 직장인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지만, 당시의 그에게는 이미 정해진 듯 보이는 앞날이 썩 달갑지 않았다.
결정적인 계기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그가 거창한 고민 없이 펴낸 독립출판물 <수상한 영화들의 수상한 제목>이 소위 대박을 터뜨린 것. 책을 편집하는 방법도 모르고, 제대로 글 한 번 써본 적 없던 시기에 내놓은 투박한 책이었음에도 반응은 뜨거웠다. 펀딩 수익이 회사 월급을 훌쩍 넘어서자 그는 회사를 떠나도 괜찮겠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게 실수였던 거죠.(웃음) 계속 만들면 월급만큼은 계속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첫 책이 펀딩 성공률이 가장 높았고, 이후로는 계속 내리막이었습니다. 출판사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혼자 서는 방법을 공부하게 된 것 같아요. 지금도 그 과정에 있고요.”
2023년 1월, 퇴사의 해방감을 안고 그가 찾은 곳은 제주였다. 하지만 동쪽 끝자락 ‘하도’에서의 한 달 살이는 낭만보다 생존에 가까웠다. 매서운 칼바람은 기본, 눈이라도 내면 속수무책으로 고립되는 곳. 한 달 뒤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그때의 혹독한 시간은 오히려 미련을 남겼다. 날 좋을 때 충분히 즐겼다면 없었을 미련을. 그는 다시 제주행을 택했다. 여행자가 아닌 이주자의 신분으로. 제주의 어느 구옥, 출판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이 별안간 시작됐다.

사실 송 대표의 시작은 알코올 플레져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소재를 다뤄보겠다는 포부를 품은 출판사 ‘소재 프레스’가 그 출발점이었다. 소재 프레스의 존재는 사라졌다기보다, 그가 지금 가장 사랑하고 몰입하는 소재인 술로 좁혀졌다고 보는 쪽에 가깝다. 훗날 그가 다른 소재를 찾아 떠난다 해도 가벼운 변심이라 오해하지는 말자. 오히려 그 순간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에 온 마음을 다하고 있다는 방증일 테니까.
그가 소재라는 키워드에 집중한 이유는 뜻밖에도 사랑에 있다. 팍팍한 도심 생활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날 선 미움을 주고받지만, 공통된 관심사 안에서만큼은 기꺼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하철에서 만났다면 무표정하게 스쳐 지나갔거나 인상을 찌푸렸을 이들이라도, 책과 술이라는 소재 아래서만큼은 기꺼이 어우러지길 그는 바란다.
실수는 성장의 증거물
오타로 전시회를 열다
독립출판의 세계는 규격화된 기성품보다는 수제 공예품에 가깝다. 대부분이 1인 또는 소수 인원으로 꾸려지는 만큼, 작가의 고유한 시선을 가감 없이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한 매력이다. 대신 대형 출판사 수준의 완벽한 검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인지 보통은 찾아보기 힘든 오탈자나 인쇄 오류 같은 문제들이 독립출판 서적에서는 심심찮게 발견되곤 한다.
송영웅 대표 역시 초창기에 아찔한 상황을 몇 번이나 겪었다. 오타 한두 개는 애교 수준이었고, 한 단락 전체가 잘못됐던 적도 있었다.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를 다독인 건 독립출판이라는 문화 그 자체였다. 실수를 실수로 용인해 주는 너그러움, 오류를 인간적인 요소로 승화하는 유쾌함이 이곳에는 있었다. ‘오타를 발견하면 보물찾기한 것 같아서 좋다’라는 어느 독자의 한마디처럼.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작자의 치부를 숨기는 대신 아예 판을 깔고 보여주는 자리를 마련했다. 독립서점 공간과 몰입에서 진행한 ‘오타 전시회’가 그 무대였다. 전시 내용은 심플했다. 가깝게 지내던 동료 작가들로부터 수집한 재밌는 오타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책은 그 물성의 특징상 수정을 못 하잖아요. 그래서 실수도 생겨나고요. 그 실수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무너지는 케이스를 너무 많이 봤어요. 저도 그럴 뻔했고요. 그런데 꼭 책이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살면서 오타가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그걸 유머러스하게 풀어보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전시를 열었던 게 지금까지 오는 데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빈틈과 허점을 찾더라도 좋게 넘어가는 존재는 눈에 띄지 않기 마련이다. 반대로 비판의 목소리는 본래의 데시벨 이상으로 크게 다가온다. <오타 전시회>는 창작자를 묵묵히 응원하던 다수의 진심을 실체화하는 작업이었다. 알코올 플레져가 지금까지의 실책을 실패 아닌 성장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전시 방명록에 담겨 있던 독자들의 진정성 때문 아니었을까.
알코올 플레져의 새출발
이제껏 없던 모습의 공간
2026년 4월, 송 대표는 제주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여전히 제주가 좋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서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길티 러브 플레져(Guilty Love Pleasure)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 공간은 일반적인 사무실과는 거리가 멀다. 알코올 플레져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아 책과 술을 함께 다루는 북 앤 보틀숍으로 조성됐기 때문이다.

길티 러브 플레져에서는 송영웅 대표가 직접 조합한 책과 술의 페어링을 만나볼 수 있다. 지금은 봄의 산뜻함과 잘 맞아떨어지는 과실주 브랜드, 댄싱 사이더와 함께한 기획전을 매장 오픈과 동시에 진행 중이다. 향후에는 월별 및 계절별 테마에 맞춘 기획전뿐만 아니라, 양조장과의 파트너십을 통한 특별 프로젝트 등 다채로운 콘텐츠로 공간을 채워나갈 계획이다.
사실 이 공간은 치밀한 계획보다는 특유의 즉흥적인 추진력으로 일궈낸 결과물이다. 고민이 길어지면 안 되는 이유만 쌓인다는 걸 알기에 제주 집 계약이 끝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임장을 다니고 계약서를 썼다. 그는 개업 전부터 벌써 석 달 치 월세를 치렀다며 서울의 매서운 현실을 실감 중이라고 말하면서도 표정에는 어쩐지 모를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술이 기쁨도 주지만 후회도 주잖아요. 당장 저만 하더라도 몇 달 전에 부산 주류 박람회에서 온갖 술을 마시다가 된통 취하는 바람에 길거리에서 뻗었었거든요. 후회막심이었죠.(웃음) 인생이 그렇듯 술도 그런 거 같아요. 후회, 사랑, 기쁨이 알코올 안에서 마치 하나의 단어처럼 공존하는 거죠. 그런 생각을 매장 이름에 담고 싶었습니다.”

알코올 플레져는 술이 단순히 쾌락을 위한 도구로만 소비되는 음주 문화의 변화를 꿈꾸고 있다. 양조인이 예술에 가깝게 공들여 빚어낸 술의 가치가 그저 취하기 위한 연료로 전락하는 세태가 안타까우니까. 가볍게 휘발되는 디지털 언어 대신 묵직한 책이라는 물성을 택한 이유도, 술이 지닌 예술적 깊이를 온전히 담아낼 그릇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술과 멀어진다는 소식에 그는 오히려 미소 짓는다. 부어라 마셔라 식의 무분별한 음주 문화가 사라지면 술의 가치를 진정으로 아끼는 이들이 그 자리를 채울 거라는 확신 때문이다. 이제야 서울에서 첫 발을 디딘 알코올 플레져의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대흥동을 시작으로 차츰 퍼져나갈 그 영향력을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