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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그대로, 리코 GR이 지켜온 것 (+ 영상)
2026-01-29T15:42:20+09:00
리코 GR

리코의 경쟁자는 리코뿐.

2026년, 리코(Ricoh) GR1이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됐다. 그동안 리코는 우직했다. 28mm 단렌즈, 단순한 조작, 작고 가벼운 크기. 외관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리코 홈페이지의 제품 소개 페이지를 나란히 놓고 보면, 이 모델이 그 모델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외골수 같은 태도야말로 리코가 30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이었을 것이다. 유행을 좇지 않고, 스펙 경쟁에 휘둘리지 않으며, 스스로 정한 기준과 방식대로 묵묵히 길을 걸어온 것. 30년 동안 리코를 리코답게 만든 힘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작고 가벼운 카메라

사진 찍는 방식을 바꾸다

1996년, 리코는 28mm 단렌즈를 단 컴팩트 카메라 GR1을 선보였다. 그전까지 카메라는 여전히 많은 준비가 필요한 기계였다. 줌 렌즈가 튀어나오고 초점을 잡는 데 시간이 걸렸으며, 그 사이 결정적인 순간은 늘 한 박자 늦었다. 

리코 GR
©RICOH

GR1은 달랐다. 주머니에서 꺼내 셔터를 누르는 순간, 사진은 이미 찍혀 있었다. 작고 가벼운 몸체는 피사체를 긴장시키지 않았고,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결과물은 훌륭했다.

이후 리코의 변화는 조심스러웠다. GR 시리즈는 오랫동안 몇 가지 형태를 고집해 왔다. 28mm 고정 화각, 줌 없는 렌즈, 손에 쥐기 쉬운 크기와 빠른 반응. 기술은 세대를 거치며 진화했지만, 이 기본 구성만큼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같은 선택을 반복해 온 우직함으로, 리코 GR은 사진 찍는 태도 자체를 바꿔 놓았다.

트렌드에 반응하지 않는다

스펙 경쟁에 올라타지 않은 이유

기술 공학의 매력은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더 많은 기능, 더 높은 수치, 더 빠른 처리 속도. 카메라 산업 역시 대부분 이 방향을 선택했다. 미러리스의 확산, 고화소 경쟁, 영상 중심의 전환, 소셜 미디어에 맞춘 색감과 기능까지. 하지만 좋은 카메라를 쓴다는 건 이런 문제와 관계 없다.

리코 GR
©RICOH

리코 GR 시리즈가 특별했던 건 성능이나 사양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리코는 기술을 아꼈다. 이미 존재하던 기술 가운데, 실제 사진을 찍는 데 필요한 것만 남겼다. 트렌드에 따라 기능을 더하기보다, 그 기능이 GR에 어울리는지 먼저 물었다. 수많은 신제품이 쏟아지는 동안에도 편리한 줌 렌즈에 주목하지 않았고, 광각 단일 초점 렌즈라는 구성을 고수했다.

기술 부족에서 비롯된 선택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빠르게 발전해 온 카메라 기술 속에서 어느새 놓쳐버린 사진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판단에 가까웠다. 리코에게 사진은 예술 이전에 세상과 대면하는 일이었다. 카메라는 그 과정에서 조용히 보조적인 역할을 하면 충분할 뿐. 어떤 장비로 찍었는지보다, 그 안에 담긴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는 게 더 중요했다. “사용자의 의도와 조화를 이루며,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도록 돕는 도구.” 카메라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리코의 대답이다.

스냅 사진을 말하다

실수도 사진이 된다

리코가 말하는 사진의 출발점은 언제나 스냅이었다. 거리의 순간,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 풍경, 우연히 마주친 장면들. 좋은 장면이 스치면 GR은 즉시 반응했다. 초점을 의식하기 전에 셔터가 눌리고, 노출을 계산하기 전에 장면이 기록됐다. 어쩌면 사진은 조금 흔들렸을지 모른다. 완벽하게 초점이 맞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리코가 만드는 사진 세계에서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리코 GR
©RICOH

GR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다른 카메라를 쓰고 나서야, 사진을 찍기 전에 얼마나 많은 판단을 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고. 정확한 노출, 완벽한 초점, 깔끔한 결과물. 이런 완벽함에 대한 요구는 때로 셔터를 망설이게 만든다. 리코는 그 망설임을 덜어내고, 순간의 감각과 직관이 사진의 중심이 되도록 했다.

28mm 하나면 충분하다

리코가 세상을 바라보는 거리

28mm는 애매한 화각이다. 넓지만 극적이지 않고, 표준보다는 살짝 멀다. 하지만 리코는 이 애매함이야말로 세상의 모습을 포착하는 데 가장 적절한 거리라고 말한다. 너무 다가가지도, 멀리서 관망하지도 않는 시선이다.

리코 GR
©RICOH

이 화각은 사진가에게 한 가지를 요구한다. 피사체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것. 장면 속으로 들어갈 것. 하지만 때로는 피사체와 약간의 거리를 둘 것. 그렇게 해서 현장에 가까워지고, 사진에는 현장의 공기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시선이 함께 담긴다. 

리코가 30년 가까이 이 화각을 고수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리코에게 28mm는 단순한 렌즈 선택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었던 것. 사진의 본질은 어떤 거리에서 세상을 마주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형태를 바꾸지 않는 고집

디자인은 기능의 결과

리코 GR
©RICOH

GR은 세대를 거듭하면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각진 실루엣, 오른손에 밀착되는 그립, 불필요한 장식 없는 외관. 리코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은 눈에 거슬리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사용자보다 앞서 나가지 않고, 사물의 본질과 사용자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GR의 디자인은 과시를 배제하고, 단순하면서도 기능적인 형태를 취했다.

단순한 고집은 아니다. 손에 쥐었을 때의 안정감,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두께, 한 손으로 모든 조작이 가능한 버튼 배치. 이런 물리적 감각은 스펙 설명란에 적혀있지 않지만, 매일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므로. 리코는 기능을 위해 디자인을 유지했고, GR의 외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또렷한 색감

기억을 불러오다

GR 시리즈의 사진은 명확하다. 강한 콘트라스트, 분명하게 나뉘는 밝음과 어둠. 이 명확한 대비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장면 속에서도 형태와 인상을 즉각적으로 붙잡아냈다. 거리 사진이나 스냅처럼 생각할 틈 없이 셔터를 눌러야 하는 상황에서 GR의 색감은 특히 힘을 발휘했다. GR이 포착한 짧은 찰나에는 순간의 공기와 분위기가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리코 GR
©RICOH

또렷했지만 가볍지 않고, 극적이지만 과장되지 않은 색감. 밝은 영역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는 장면을 읽을 수 있을 만큼의 정보가 남아 있었다. 드라마틱함과 자연스러움 그 사이에서, 우연성 및 속도가 중요한 일상 스냅은 유독 잘 어울렸다.

그래서 GR로 찍은 사진은 종종 개인적인 기록으로 남는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진이 아니라, 찍은 사람 스스로가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사진. 중요한 건 장면의 완성도가 아니라, 그때 내가 경험한 감정과 기억을 시각적으로 기록하고 붙잡아 두는 일일 것이다. GR의 색감은 “이때는 이런 일이 있었지”라고 기억을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오래된 카메라가 아니라 오래 쓰는 카메라

리코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리코 GR
©RICOH

30년 동안 리코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카메라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사진은 언제 시작되는가. 이 질문은 리코가 내세우는 GR의 개발 원칙과도 맞닿아 있다. “모델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라는 원칙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새로운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함께할 수 있느냐는 판단일 것이다. 

리코 GR을 사용한다는 것은 이 태도에 동의하는 일에 가깝다. 카메라는 소비되는 물건이 아니라, 시간을 함께 쌓아가는 도구라는 생각. 그래서 한 번 손에 익은 사람에게 GR은 그 어떤 카메라보다 효율적인 도구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는 기함급 카메라가 아니라, 지금 당신의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이므로. 리코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사람은, 리코가 보여주는 사진 세계를 계속해서 궁금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