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8월 15일 여기서 만나요.” 2015년 8월 15일, 안동역에서 만난 ‘다큐 3일’ 팀과 두 청년은 10년 뒤의 재회를 기약했다. 그 오랜 약속이 실현되기를 모두의 마음이 모였던 그날, 어쩌면 그저 장난이었을지 모를 그 만남은 현실이 됐다. 갈수록 파편화되어 가는 시대에서 그들이 보여준 낭만은, 그 누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위로와 감동을 전했다.
누군가에게는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을 기간이기도, 또 누군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했을 세월이기도 한 10년. 모두에게 10년이라는 시간이 똑같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어떻게 바뀌었고 무엇을 지켜나가고 있었을까? 각자의 위치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다섯 남자에게 물음을 던졌다. 당신의 10년 전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박해웅, 목공방 운영 (@forest_of_furniture)
어렸을 때부터 별을 좋아했다. 밤하늘이 좋았고, 달이 좋았고, 지구과학이 좋았다. 별을 연구하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부터는 줄곧 천문학자를 동경했다. 그러다 현실적인 어려움과 입대가 맞물리면서 꿈을 내려놓게 됐다. 군대에서는 그저 즉각적이고 단순한 일상을 보내기에 급급했다. 전역을 목전에 두고 나서야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라는 문장이 나를 붙잡았고, 삶의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사회로 돌아왔다.
당연히도 방황의 연속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내던 지난날들만 그리워할 뿐 무엇 하나 시도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기회로 목공을 접하게 되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내게 잘 맞았다.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목공방 특유의 느슨하고 완만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매료됐던 별의 느릿한 움직임과 닮아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하나하나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성취감과 자신감이 되었다. 그렇게 취미였던 목공을 꾸준히 이어갔고, 지금은 어엿한 목공방의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10년 전의 내가 지금을 본다면 바라던 것을 이뤄내며 성장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1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낀다. 깎이고 채워지며 단련이 되었을지언정, 천천한 삶을 살아가는 큰 틀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고준서(JEEM), 댄서 (@masterpiece_jeem)
10년도 더 전, 춤을 처음 배울 때 주위의 반응을 잊을 수가 없다. 춤춰서 뭐 할 거냐는 둥, 딴따라 될 거냐는 둥. 주변의 걱정 아닌 걱정과 부모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왁킹이라는 장르의 춤을 배워나갔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댄서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고,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몸소 겪은 불합리한 댄스 교육 환경은 내게 뚜렷한 문제의식으로 각인되었다.
빛고을댄서스는 당시 완연했던 부조리를 해소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졌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대회를 만들고자 빛고을댄서스가 기획한 ‘배틀 라인업’은 어느덧 한국을 대표하는 스트릿댄스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빛고을댄서스뿐만 아니라, 같은 목적을 가지고 다양한 위치에서 애써주시는 분들 덕분에 대학교나 대학원 같은 고등교육 환경 또한 개선될 수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춤을 시작하는 키즈 댄서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지난 10년간 댄스 씬과 내 삶에 크나큰 변화가 있었음을 체감한다. 10년 전 춤을 사랑하던 학생은 이제 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지만, 앞으로의 10년은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댄서로 거듭나고자 한다.

최지인, 시인
2015년 8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종로에 있는 한 작은 출판사에 취직했다. 총무로 일하던 독서실의 열람실에서 2년 동안 숙식한 터라, 졸업과 취업은 내게 탈출을 의미했다.
서울로 출퇴근하기 위해 답십리역 앞에 있는 여섯 평짜리 오피스텔을 얻었다. 첫 직장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겨우 한 달 만에 그만뒀다. 직장 생활도, 작품 활동도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글쓰기를 지속하기 위해 일을 시작했지만,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0년 동안 다섯 군데의 출판사에 다녔다. 지금은 협동조합 조합원으로 마을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세 권의 시집과 두 권의 동인 시집을 펴냈다. 서울에서 고양으로, 고양에서 파주로 이사하며 단칸방에서 투룸으로, 투룸에서 아파트로 주거 공간이 넓어졌다. 출판사에서 만난 동료와 결혼하여 귀여운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다.
10년 후 나는 어디에 있을까.

김영진, 건설회사 기획팀 재직 (@taekp_hyeong)
스물다섯의 나는 늘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런저런 경험을 쌓아도 남는 건 공허함과 외로움뿐이었다. 당시 나는 타인의 인정을 갈망했고, 그 때문에 삶의 우선순위는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맞춰져 있었다. 패션도 마찬가지였다. 유행을 좇아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으면서도, 정작 나다운 모습은 찾지 못했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도 여전히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는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 ‘싫은 건 하지 않을 자유’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남들의 기대보다는 내 판단을 앞세우고, 누군가의 눈보다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 변화는 옷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나의 인스타그램 아이디 ‘take personality’처럼,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입는다. 잘 어울려서든, 잘 꾸밀 수 있어서든, 아니면 그저 내가 좋아서든.
앞으로의 10년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는 여전한 고민거리다. 하지만 이제는 조급하지 않다. 10년 전엔 몰랐던 ‘나’를 옷으로, 그리고 선택으로 조금씩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천성윤, 기자
해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던 게 정확히 10년 전의 일이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여느 20대와 마찬가지로 불안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갈피를 전혀 잡지 못했다. 앞날은 정해지지 않았고, 생활은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바보 같은 실수도 참 많이 했었다. 어느새 훌쩍 시간이 지난 지금은 좋아하는 일을 꽤 안정적으로 해내고 있다.
순식간에 지나간 1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느낀 바도 분명히 있다. 어릴 땐 그렇게나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경우도 있었고, 별거 아니라고 무시했던 게 알고 보면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이를테면 영원할 줄 알았던 건강의 소중함을 이제야 서서히 깨우치거나, 지나치게 괴로워했던 인간관계는 힘을 좀 빼도 괜찮다는 것.
이전과 나와 지금의 나는 성격도, 외모도, 가치관도 적잖이 다르다. 공통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때보다 약간 더 아는 게 많고, 취향이 넓어지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 지금의 내가 훨씬 좋다는 거다. 앞으로의 10년도 또 다른 불안과 시행착오의 연속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끝에는, 지금처럼 ‘그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