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의 구두 가게 팔러가 문을 연 지 딱 10년. 골목 안쪽에 있던 매장은 큰 대로변으로 나왔고, 한옥을 개조한 건물 내부는 보다 모던해졌다. 구두를 대하는 문법은 그대로다. 클래식한 남성 구두를 지향할 것. 알든부터 버윅, 샌더스 등 팔러에서 만난 구두 브랜드는 빠른 유행 속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키고 있었다. 팔러의 황재환 대표를 만났다.
팔러에 대해 소개해달라.
클래식한 남성화를 만날 수 있는 편집 매장이다. 팔러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사롱 ‘낙랑파라’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1930년대 이상, 구본웅, 박태원 등의 예술가가 모여 차를 마시고 문학과 예술을 논하던 아지트다.
팔러는 남자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으면 했다. 편하게 들러 신어보고 싶은 구두 마음껏 신어보고, 같이 이야기 나누며 위스키를 마시는 공간. 옛날 영국 가정집에 가면 식사를 한 뒤 팔러(Parlour, 응접실)로 이동해 위스키와 시가를 즐기지 않나. 그런 사랑방 개념에서 시작했다.
매장을 이전하며 인테리어가 바뀌었다. 내부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가림막은 큰 도전이었을 텐데.
안에 있는 손님들을 보호하고 싶었다. 신발을 신다 보면 짧게는 30분, 길게는 2시간씩 이곳에 머물게 되니까. 잘 맞는 구두를 찾는 건 발 사이즈를 정확히 재는 데서 시작한다. 이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하고, 신발 하나를 본다 해도 사이즈 두세 개는 신어봐야 하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구두 전문 편집 매장을 생각한 이유가 있나.
신발을 매우 좋아했다. 다만 남들이 많이 신는 브랜드에는 매력을 못 느꼈고, 그 역사나 만듦새, 소재가 설득력이 있는 브랜드에 매료됐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 없는 걸 찾게 되더라.
당시 보트 슈즈만 해도 유사한 디자인은 있었지만 오리지널 브랜드는 한국에 없었다. 이를 구매하기 위해 해외 브랜드에 무작정 메일을 보냈고, 직접 물건을 받았다. 해외 직구가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을 때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위해 직접 구매한 경험이 팔러를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됐다.
팔러에서 판매하는 구두는 몇십만 원에서 100만 원이 넘기도 한다. 구두 가격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텐데. 꼭 이 가격을 지불해야 할 가치나 이유가 있나?
표면적인 이유는 많다. 좋은 가죽을 사용하고, 섬세한 공법으로 만들고, 오래 신을 수 있고 등등. 하지만 그냥 갖고 싶을 수도 있다. 일종의 자기만족과 과시 목적일 거다. 30만 원 시계와 3천만 원 시계 모두 시간을 볼 수 있지만, 3천만 원짜리 시계를 더 갖고 싶어 하는 것처럼. 구두 가격은 품질을 그대로 반영하지만, 가격이 절대적인 건 아니다.
브랜드 이름 자체로 값어치가 매겨지는 경우도 있다.
알든이 그렇다. 1800년대 후반에 생겨났는데, 그 당시만 해도 메사추세츠 근교에 500개가 넘는 공장과 브랜드가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대량 생산 시대와 맞물리면서 공장이 다 떠나게 된 거다. 이때 알든 만이 기존 형태를 유지하면서 높은 품질에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보니 미국을 대표하는 구두 브랜드가 되더라. ‘오직 미국에서 모든 공정이 이뤄지는 구두’라는 정체성이 확실하다.
남성 구두 브랜드는 짧게는 50년, 길게는 1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오늘날 빠르게 지나가는 트렌드에 휩싸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뭘까?
역사가 오래되면서 하나의 장르가 된 신발 브랜드가 있다. 특수한 가죽을 쓴다든지, 구두의 라스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원형을 갖게 된 거다. 이런 디자인이라면 특정 브랜드가 떠오르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고 아카이브가 쌓이면서 하나의 스타일로 남았다. 패션은 유행이지만 스타일은 계속 이어진다.
남자 구두의 세계는 여성보다 깊고 섬세하다는 인상이다. 스타일이 한정되기 때문에 더 디테일에 신경 쓰는 걸까.
남자 구두를 두고 ‘안 되는 것도 없지만 되는 것도 없다’는 말을 한다. 바꿀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지만, 또 따지고 보면 그렇게 많지도 않으니까.
가죽과 라스트가 모두 같아도 전체적 느낌이 다를 수 있다. 아웃솔이 싱글이냐 더블이냐에 따라서 내피가 다르게 들어가고, 그에 따라 아일렛과 슈레이스 크기, 부드럽고 딱딱한 정도도 달라진다. 작은 디테일이 전체적인 밸런스 차이를 만들고, 완전히 다른 신발이 되는 거다.
요즘은 구두의 영역이 좁아진 것 같다. 옷차림이 편해진 이유도 있고, 구두를 신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구두를 안 신기보다는 포멀한 드레스 슈즈를 안 신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수트에 매칭하는 구두의 수요는 줄었지만, 가죽 신발에 대한 수요는 여전하다고 할까. 시대가 변하면서 점점 편한 쪽으로 바뀌는 것뿐이다. 또한 멋있고 싶은 열망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때 무슨 신발을 신어야 할지 고민된다면, 좋은 가죽으로 만든 잘 만든 구두를 신으시라 말하고 싶다.
옷과 신발의 조화는 중요한데. 그중 어디에 더 투자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구두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는 말이 있다. 80만 원 슈트와 20만 원 구두를 산다면 그 슈트가 50만원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50만 원 구두와 50만 원 수트를 사면 그 수트는 80만 원 정도로 보일 거라고. 꼭 비쌀 필요는 없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가죽으로, 본드로 붙이기 보다 한 땀 한 땀 꿰매 만든 신발이라면 충분히 값어치를 할 거다.
팔러를 10년째 운영하며 구두에 대한 데이터가 많이 쌓였을 것 같다. 좋은 구두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는지?
일종의 마지노선이 있다. 라스트에 대한 독창성이 있는지, 일정 수준의 가죽을 사용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는지. 구두 쉐입을 직접 연구 개발하는 것과 유행하는 모양을 그대로 따와서 만드는 것의 차이는 크다. 만드는 방식은 내구성과 연결된다. 수 세기 전부터 한땀 한땀 복잡하게 만들어온 과정이 신발 구조와 만듦새, 이미지를 만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죽의 차이가 느껴지기도 한다. 잘 늙어간다고 해야 할까. 남루해지기보다 잘 익어간다.
가장 좋아하는 신발을 말한다면?
작품처럼 만든 신발이 좋다. 비싼 신발이 좋다는 건 아니고, 얼마나 공들여 만드느냐의 문제다. 남자 구두는 디테일이 많은 세계다. 구두 한 켤레를 만드는 데 거치는 과정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으니까. 갑피에 박음질하냐, 구멍을 뚫느냐에 따라 전체 밸런스가 많이 달라진다. 가죽의 부드러운 정도에 따라서 디자인이 달라질 수도, 접합 구조가 달라질 수도 있다.
가죽 가공은 매우 노동집약적이라 한 번 매만질 때마다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진다. 같은 디자인의 신발도 디테일에 따라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지는 이유다. 마치 하나의 창작물처럼 정성껏 다듬을수록 멋지게 길든다.
갖고 있는 신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20년 정도 됐다. 구두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됐을 때 ‘제대로 된 신발이 과연 뭘까’라는 호기심으로 산 로크 구두다. 언제 샀고, 어쩌다 상처가 났는지도 남게 됐는지도 다 기억난다. 내 모든 움직임과 시간을 담고 있는 셈이다.
매장 한편에 보면 신발이 전시되어 있다. 나와 스태프들이 신던 신발들이다. 지금 갈색으로 보이는 신발은 원래 빨간색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맛이 더해지고, 어디에도 없는 내 신발이 됐다. 인생을 함께 살아온 존재다.
구두를 오래 신기 위해 관리하는 방법이 있을까?
가죽은 사람 피부와 똑같다. 먼지를 털어주고 유수분 밸런스를 맞춰주면 된다. 자기 몸을 관리하는 것처럼. 가죽 종류에 따라서도 관리를 다르게 한다. 사람 피부에도 지성과 건성이 있듯이 다른 종류를 사용하는 거다. 아웃솔이 가죽으로 되어 있는 경우 영양분을 공급하는 동시에 방수 성능을 높여줘야 하고, 스웨이드는 클리너를 사용해 오염된 부분을 지워줘야 한다. 코도반이나 워크 부츠 등 오일 함량이 많은 신발은 유수분 함량이 높은 크림으로 닦아주는 게 좋다.
마지막 질문이다. 많은 남성이 나만의 구두를 찾기 위해 헤맨다. 나와 잘 맞는 구두를 찾기 위한 조언이 있다면?
발등이나 길이, 발볼 등이 어디 한 군데 남지 않고 발과 잘 밀착되면 착화감이 좋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아무리 편한 신발을 신어도 오래 걷거나 서 있다 보면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신어 보면서 판단하게 되는 경우다. 결국 계속 신으면서 나에게 길드는 구두가 가장 좋지 않을까. 사이즈가 정확하고 발 모양에 맞는 라스트가 궁합을 이루면 발을 잘 감싸주며 내게 길드는 신발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