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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컴뱃의 시대, 로드FC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2023-08-03T14:08:48+09:00

‘배신자’ 명현만과 화해까지,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바야흐로 블랙컴뱃의 시대다. 블랙컴뱃은 종합격투기(MMA)에 프로 레슬링적 요소를 도입해 선수들 간의 스토리를 만들고 케이지에서 주먹으로 결판을 내는 콘텐츠를 내세워 크게 흥행하고 있다. 뛰어난 각본과 영상미에 더해 이제는 선수들의 수준까지 높아져 기존 격투기 팬이 아니었던 새로운 팬을 끌어들임과 동시에 기존격투기 팬들에게도 극찬을 받고 있다. 이제는 CJ CGV와 파트너십 계약을 맺어 영화관에서 대회를 유료 상영하고 있으며, 대회마다 2,000-2,500석의 객석을 꽉 채우고 있다.

블랙컴뱃은 단체 대표들이 ‘우리가 사비를 지출하면서 희생하고 있다!’는 소리만 하던 국내 시장에서 처음으로 격투기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 여전히 미국이나 일본 단체, 국내 UFC 대회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지만, 일단 국내 단체라면 팬들이 무시하고 보는 국내 격투기 환경에서 이 정도면 대단한 성과다. 덕분에 평생 무명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격투기 선수들은 이제 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고 수백만 원 대의 스폰서 지원금을 받으며 싸우고 있다. 전 UFC 파이터 손진수의 말대로 이제 한국 MMA 지형은 블랙컴뱃과 그 나머지로 이뤄져 있다. 블랙컴뱃 공식 출범 1년 만의 성과다.


<출처: ROAD FC>

기존 단체들의 위기 

블랙컴뱃의 성공을 보며 가장 충격을 받은 건 다른 국내 단체들이다. 지금까지 국내 단체들은 초대권 뿌리거나 선수들이 직접 지인들에게 파는 표를 제외하면 유료 관중을 동원해본 적이 없었다. 블랙컴뱃은 그걸 해냈다는 것은 완전한 패러다임 변화였다. 이에 다른 단체들도 대응에 나설 필요성이 생겼다.  

AFC는 블랙컴뱃과 좀비트립 등을 벤치마킹해 자극적인 격투기 예능인 <다이다이>를 론칭해 AFC 대회와의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있다. 한때 선수층으로 따지면 로드FC에 뒤질 게 없다는 평가를 받았던 더블지FC는 대회 규모를 크게 줄였다. 아레나에서 대회를 개최하는 대신 오피셜짐에서 소수의 인원만 초대해 소규모로 대회를 열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건 기존 1위 단체였던 로드FC다. 로드FC는 그동안 한국 수준을 넘어 아시아 No. 1 단체를 자처했다. 한때 중국 기업 샤오미의 스폰서를 받으며 중국에도 진출하고, 지상파 예능 방송에 송가연을 출연시키고, 4,500석 규모의 장충체육관에서 대회를 개최하고, 100만 불 토너먼트를 여는 등 지금의 블랙컴뱃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었다. 하지만 야심 차게 키운 송가연이 계약 분쟁으로 빠지고, 사드 배치 문제로 인한 중국의 한한령으로 샤오미 스폰서도 빠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사태까지 생기며 사세가 크게 위축됐다. 여기에 결정타를 먹인 게 블랙컴뱃의 성장이다. 

<출처: 블랙컴뱃 유튜브 채널>

블랙컴뱃은 경기 영상 하나당 최소 30-40만의 유튜브 뷰를 자랑하고 있다. 반면 로드FC의 최근 경기들은 은퇴가 다가온 노장 권아솔 한 명을 제외하면 5만을 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물론 로드FC는 실황 중계를 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블랙컴뱃과 비교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황 중계라는 게 어차피 시청자 수가 몇 천정도 나오고 몇만 수준은 넘기 어려운 게 현 상황이라 큰 의미는 없는 걸로 보인다.

지금은 그나마 있던 대회조차도 거의 열리고 있지 않다. 메인 대회인 넘버링 대회를 1년에 2-3회밖에 개최하지 못할 정도로 선수 풀이나 단체의 자금력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결국 선수들이 블랙컴뱃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양해준은 현재 블랙컴뱃 중량급 챔피언이 됐고, 현 로드FC 미들급 챔피언 황인수를 5초 만에 KO 시킨 최원준도 블랙컴뱃으로 넘어갔다. 밴텀급 챔피언이었던 김민우 역시 블랙컴뱃에서 활약하고 있다.

<출처: ROAD FC 유튜브 채널>

이제 로드FC에 남은 스타 파이터는 진작에 은퇴했어야 하는 몸 상태인 권아솔과 미들급 챔피언 황인수 정도밖에 없다. 김태인이 기대를 받고 있지만 아직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 않다. 밴텀급과 페더급에서 챔피언을 지낸 김수철과 라이트급 챔피언 박시원은 경기력 측면에서는 뛰어나지만, 아직 흥행성은 높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로드FC가 더 이상 스타를 키워내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과거 로드FC도 많은 스타를 탄생시켰지만 요즘 로드FC의 마케팅은 팬들로부터 ‘올드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외면받고 있다.

무명 선수들을 인기 파이터로 만들어내는 블랙컴뱃의 프로모션 능력이 로드FC에는 없다. 예를 들어, 로드FC에서 활약할 때 무명에 가까웠던 신승민은 ‘광남’으로 잘나가고 있다. 챔피언이었지만 전 UFC 무패 챔피언인 하빕 누르마고메도프의 인정을 받은 걸 빼면 사람들이 잘 몰랐던 김민우도 인생 최대의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여전히 홈페이지 소개는 아시아 No. 1 대한민국 종합격투기 단체라고 돼 있지만, 한국 팬들은 이제 더 이상 로드FC를 국내 1위 단체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다.


<출처: ROAD FC>

로드FC의 변화: 문호 개방 

위기를 감지한 로드FC가 변했다. 이제 로드FC는 문호를 개방해 다양한 선수를 받아들이고 있다. 명현만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로드FC는 스스로 No. 1 단체이기 때문에 세계 1위 단체인 UFC에 선수를 보내기 싫어하고, 선수를 장기 독점 계약으로 묶어두는 걸로 알려졌다. 그뿐 아니라 소위 로드FC 사측에 충성하는 체육관과 선수들만 밀어주고, 그렇지 않은 체육관과 선수들은 배제하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 사측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선수들은 대놓고 ‘배신자’로 몰았다. 로드FC가 한창 잘나갈 때라면 이렇게 고압적인 자세가 통했을지 몰라도 샤오미 스폰서가 떨어진 로드FC는 더 이상 선수를 끌어들일 매력이 없었다. 그래서 로드FC 선수 풀은 극도로 좁아진 상황이었다.

그러던 로드FC가 명현만과 황인수의 킥복싱 대결을 깜짝 발표했다. 명현만은 로드FC와 사이가 안 좋은 대표적인 파이터 중 하나다. 로드FC 시절 명현만은 인기 파이터가 아니었지만, 로드FC를 나온 후로 유튜브에서 승승장구하며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격투기 선수가 됐다. 이후 로드FC는 세력을 동원해 명현만에게 배신자 프레임을 씌웠고, 명현만이 MMA 선수로서는 실력이 부족해 라이트급 선수인 권아솔에게도 진다며 비방해왔다. 그러던 명현만과 다시 손을 잡을 정도면 로드FC가 큰 위기에 맞서 큰 결심을 했다는 뜻이다.

또 놀라운 건 더블지FC 헤비급 챔피언인 ‘맘모스’ 김명환을 데려와서 심건오와 매치업했다는 것이다. 로드FC는 그동안 더블지FC나 AFC는 로드FC와 격이 다르기 때문에 교류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해왔다. 하지만 이제 교류를 하겠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재밌는 건 이러한 결정이 블랙컴뱃 견제의 일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명환은 블랙컴뱃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선수로, 더블지FC 헤비급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최근에는 블랙컴뱃과 교류전을 펼친 일본 딥(DEEP)의 아카자와 유키노리가 콜아웃하기도 했다. 즉, 김명환 영입은 로드FC가 더블지FC와 손을 잡고 블랙컴뱃을 견제하는 모양새로 읽힐 수도 있다. 이교덕 기자가 말하는 반(反)블랙컴뱃 연대다.


<출처: ROAD FC>

변화가 못마땅하다는 회장님, 이대로 괜찮을까

아직까지는 일회성 이벤트이지만 로드FC도 이제 변화를 주겠다는 뜻은 확고해 보인다. 이제 ‘과연 로드FC의 다음 카드는 무엇인가?’, ‘이러한 변화는 블랙컴뱃과 다시 경쟁이 가능한 수준까지 로드FC의 위상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와 같은 재미있는 질문들이 남았다.

하지만 역시 로드FC의 가장 큰 리스크는 정문홍 회장이다. 정문홍 회장은 명현만과 황인수의 대결을 성사시키며 이 상황이 못마땅하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열심히 대회를 홍보해도 모자랄 판에 또 비호감을 산 것이다.

그는 지난 1월 30일 열린 로드FC 063 기자회견에서 “이번 대회를 열면서도 개인적으로 참 이해가 안 되는 게 많았다. 젊은 세대의 팬들이 (이런 경기를) 좋아한다면 인정해야 한다. 팬들이 원하는 것을 안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라며 명현만 대 황인수의 경기를 성사시키는 게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돌려 말한 것이지만, ‘사실상 블랙컴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긴 하지만 자신은 블랙컴뱃이 싫다’는 얘기다. 이어서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격투기계가 매우 이상해졌다. 기준을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데, 너무 혼탁한 세상이 돼 버렸다. 이는 훗날 좋은 기록으로 남을 수 없다.”고 한탄했다.

연예인 금광산과 김재훈의 경기를 성사시키고, 한쪽 눈이 사실상 실명된 50살이 넘은 연예인 김보성을 케이지에 올린 사람이 할 얘기는 아니다. 결국 정문홍 회장의 이런 내로남불, 자기만 옳고 남들은 다 그르다는 선지자 의식,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내가 다 받겠다는 자의식 과잉이 로드FC에 대한 팬들의 혐오로 이어지는 것이다. 로드FC의 변화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정문홍 회장의 변화가 없다면 과연 얼마나 성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국내 격투기 팬들에게는 재밌는 상황이다. 로드FC의 침체 이후 국내 격투기 팬들이 즐길 만한 콘텐츠는 많이 없었다. AFC, 더블지FC에서도 수준 높은 경기가 펼쳐졌지만, 대중에겐 어필하지 못했다. 블랙컴뱃의 등장으로 격투기에는 완전 새 판이 깔렸다. 이제 기존의 격투기 단체들도 변화를 강요받게 됐다. 치열한 경쟁이 펼쳐질수록 승자는 팬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