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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시계를 돌려, 텐트
2023-11-01T13:20:00+09:00

삶의 꼴이 담긴 이동 가옥.

공적 영역에서 사적 공간을 확보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더욱이 사회관계망 속에서 자의든 타의든 끊임없이 타인에게 곁을 내어줘야 하는 이 시대에는 온전히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자기만의 방을 만들고 싶어 한다. 갑갑한 도시 생활로부터 잠시 비켜서 있기 위해 광활한 자연으로 나아가 캠핑을 한다해도 우리는 텐트를 피칭하며 외부와 분리된 공간을 구축하지 않던가. 사막 모래 바람을 피하고, 야생 동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예측할 수 없는 기상 상황으로부터 피신하기 위해 본능처럼 안과 밖을 구분 지어왔던 인류와 텐트는 이런 의미에서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별한 건축 기술이 없어도 주어진 것으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 맞는 집, 그러니까 자신만의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 왔으니 말이다.

처음이라 불리는 텐트 유적은 BC 4만 년 전 러시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기 4장 20절에는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라는 구절로 텐트의 활용을 유추해볼 수 있다. 긴 여정의 실크로드 행렬에서도 이 텐트는 하루의 고단함을 받아내 주는 안식처로서 역할을 해냈다. 텐트는 인간의 필요 욕구에 충실히 반응하며 ‘삶의 꼴’을 투영해 같고 또 다른 쓰임으로 상존해 오고 있는 중이다. 특히 유목민들의 가옥 형태에서 두드러진다.

출처 Wikipedia

바람처럼 홀연히 떠나도록, 이런 가옥들

텐트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이동성이다. 가축을 먹이고 기르기 위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야 하는 유목민들에게 분리와 조립이 용이하고 기르는 동물을 이용해 운반할 수 있고, 가죽을 활용해 천막을 만들 수 있는 여러 조건은 텐트라는 이동 가옥을 사용할 충분한 이유가 되고 곧 이것은 생존과도 직결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현재도 많은 이들이 찾는 원뿔형 구조 티피(Teepee) 텐트는 3만 년 전 북미 전역으로 이동했던 인디언들의 집으로 ‘티피’라는 단어는 라코타어로 ‘주거’를 의미한다. 스킨 벽을 타고 나무를 세운 후 위를 묶는 구조로 보통 무두질한 들소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방수, 방풍, 통풍이 잘되며 여름은 덥고 겨울은 혹독하게 추운 대평원의 대륙성 기후에 맞춤이었다. 텐트 천장으로는 연기를 내보낼 수도 있어 텐트 안에서 불을 피우기도 가능했다. 입구는 해가 뜨는 동쪽으로 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흔히 게르라 불리는 유르트(Yurt)의 존재는 BC 600년 만들어진 청동 그릇에서 발견된다. 유르트는 나무 격자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둥근 형태로 현재에도 몽골인들의 거처가 되어 주는 가옥 형태다. 스킨으로 사용하는 염소, 양, 야크 섬유는 통기성과 단열성이 뛰어나고, 둥그런 구조는 강한 바람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안정성을 지녔다. 유르트는 몽골인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와 투르크계 사람들도 사용했다.

아라비아반도 아랍 유목민 베두인족의 텐트의 역사는 서기 600~8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늘과 닿은 천막 부분이 검은색이라 ‘머리카락 집’이라고도 불린다. 검은색 섬유는 한낮 태양열을 흡수해 밤이 되면 급격히 떨어지는 기온에서 막사를 따뜻하게 유지해 줬고, 동물의 털로 만들어 가죽보다 훨씬 가볍고 더 큰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두루 사용되었으며 초기에는 동그란 형태였지만 후기에는 직사각형으로 지어졌다. 텐트 설치에는 1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또한 북극해 연안에 사는 이누이트들도 사냥감을 따라 이동 생활을 했는데, 겨울에는 이글루에서 여름에는 투픽(Tupiq)이라고 불리는 막사에서 지냈다. 노르웨이에서 러시아에 이르는 북유럽 사미족은 라부(Lavvu)라고 하는 원뿔형 은신처에 기거했다.

빠른 설치와 철수가 관건, 진격을 위한 거처

전쟁의 역사와 텐트 기술의 발전은 궤를 같이한다. 텐트는 아픈 병사들을 치료하는 병원이 되기도, 고된 전투 후 잠시 숨을 고르는 피난처이기도 하며, 작전 수립과 지시의 공간이 되는 중요 기지이기도 하다. 불필요한 힘을 빼지 않고 신속하게 철수 및 세팅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더 가볍고, 간단한 구조가 요구됐다. 철수와 설치가 간단한 A자형 텐트를 사용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군사들의 요구에 반응하며 두 번의 세계 대전이라는 참혹한 과정에서 텐트뿐만 아니라 랜턴, 버너 등과 같은 다른 캠핑 장비들도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출처 Wikipedia

지중해를 장악했던 로마제국 군대는 8명 정도로 구성된 하나의 분대, 콘투베르니움(Contubernium)이 하나의 막사를 공동으로 사용했다. 로마제정 초기 사상가이자 군대 사령관이었던 플리니(Pliny the Elder)가 막사 생활에 대해 묘사한 부분에서 ‘피혁 아래’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보통 송아지 가죽을 썼다. 가죽 특성상 여러 번 사용해도 변질하거나 상하는 감이 적었고, 가벼워 비교적 텐트를 쉽고 빠르게 철수하고 설치할 수 있었다. 기동성이 생명인 군대에서는 최선의 선택지였을 것이다.

미군 장교 헨리 홉킨스 시블리(Henry Hopkins Sibley)가 발명한 시블리 텐트는 미국 남북전쟁에 등장한다. 1856년 4월 22일 이 텐트는 미국 특허청에 등록되었고, 1858년 미 국방성과의 협정에 따라 시블리에게 텐트당 5달러씩이 주어졌다. 티피 텐트에서 영감을 받은 원뿔 모양 형태로 상단 구멍이 굴뚝 역할을 하는 것도 동일했다. 지름이 5.5 m, 높이가 3.7m 정도로 12명의 군사가 잘 수 있는 크기. 하지만 이 텐트는 1862년에 전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군대가 감당하기에는 비싸고, 크고, 거추장스러웠고 이를 운반을 위해서는 마차가 몇 대나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1862년 군대는 ‘도그 텐트’라고도 불리는 훨씬 작고 휴대가 간편한 형태의 천막을 만들기 시작했다. 병사 1인당 텐트 반 개가 지급됐는데, 반이라는 것의 의미는 진영에 들어갈 때 다른 병사와 짝을 지어 반쪽씩을 연결해 하나를 만드는 형태라는 얘기다. 적어도 두 사람이 앉거나 누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크기로 역 V자 모양의 쉼터였다. 만약 더 큰 사이즈를 원할 때는 세 개 이상을 연결할 수도 있었다. 이는 소총을 땅에 박고, 밧줄을 묶어 지지했다.

사병들을 제외한 장교들은 일반적으로 개인 텐트를 가지고 있었다. 고위 장교들은 양치기 텐트라고도 불리는 높은 수직 벽이 특징인 ‘월 텐트’를 배급받기도 했다. 월 텐트는 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최대 20여 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사이즈였다. 물론 장교에게 하사된 건 보다 작았다.

최초로 돔형 텐트를 만들다, 빌 모스

하지만 전쟁이 끝나도 텐트의 형태는 A 프레임에서 도통 벗어나지 못했다. 이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패브릭 아티스트이자 디자이너 빌 모스(Bill moss, 1923~1994). 그는 남북 전쟁 이후 변화가 없는 텐트 디자인을 개탄하며 직접 1955년 최초의 돔형 텐트인 팝 텐트(Pop Tent)를 내놓는다.

그 후 그는 본격적으로 디자인 회사인 모스 그룹(Moss Group)을 설립하고, 그 아래 텐트 전문 브랜드 ‘모스’를 세운다. 무겁고 칙칙한 초록색 스킨과 폴에서부터 해방해 몇 개의 폴대만으로 자립하는 제품을 만들어 우리 일상에 캠핑을 더욱 깊숙하게 침투시킨 셈이다. 그의 건축학적 감각과 디자인적 감성이 덧입혀진 ‘시드니’, ‘빅 디퍼’, ‘앙코르’, ‘스타돔’ 등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내세운 수많은 텐트는 아직도 회자하고 카피와 오마주 사이를 서성이며 끊임없이 변주된 모습으로 시장에 나오고 있다. 참고로 모스 그룹은 2001년 MSR에 인수 합병됐다.

이렇게 시작된 텐트 시장의 변화 이야기는 2편에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