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px
닫기

임볼든 앱을 홈 화면에 추가하여 간편하게 이용하세요.

하단 공유버튼() 선택 후, '홈 화면에 추가(홈 화면에 추가)'

에디터들의 플레이리스트: 킹갓세종, 한글 가사로 꽉 채워진 9곡
2023-02-21T16:36:11+09:00

영어 가사에서 갑자기 웅얼거리는 약한 모습은 그만.

전 세계 자국어를 가진 나라는 고작 28개국, 게다가 한글은 세계 유산이라고 칭해질 만큼 우수한 활자아니던가. 고로 그 수혜를 누리는 우리는 가진 것은 주머니 속 먼지뿐이지만 나라 잘 만난 행운아다. 다가오는 한글날, 킹갓세종의 위엄을 받들어 잠시 꼬부랑 글씨 내려놓고 한글로만 반듯하게 채워진 노래를 음미해 보자. 영어 가사에서 갑자기 웅얼거리는 약한 모습은 그만, 속속들이 해석 가능한 모음과 자음의 아름다운 컬래버를 만끽해보시라.

에디터 푸네스의 추천곡

Track 01. 새소년 – 난춘

새소년이라는 밴드의 성취는 단연코 가사에 있다. 오묘한 음색을 가진 황소윤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랫말은 어떤 조악한 멜로디 속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낼 거란 확신이 든다. 2018년 봄에 공개된 ‘어지러운 봄’을 뜻하는 ‘난춘’은 올해 5월 재발매 되어 제목처럼 혼란스러운 현재 상황과 맞물려 많은 이들의 마음과 귀를 홀렸다. 이 노래의 메시지는 각자가 짊어진 난춘의 시기를 딛고, 그럼에도 ‘살자’로 귀결되겠다.

하지만 이 강력한 의미에 도달하기도 전, 우리는 가사에 흩뿌려진 섬세하고 아름다운 위로의 풍경에 매몰되고 만다. ‘네 눈을 닮은 사랑, 그 안에 지는 계절’이란 구절이 들려오면, 그대와 지금을 이겨낼 수 있을 거란 어떤 희망을 먼저 읽게 되니까.

Track 02. 신인류 – 작가미정

완연한 어른으로 성장해 있을 줄 있었던 비틀거리는 서른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 삽입된 노래다. 다른 브금 트랙,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다’던 발랄한 장범준의 노래와는 다른 분위기를 가진 곡. 너와 나 사이에 들어찬, 의미를 갖지 못한 단어들을 쓸쓸히 마주한 적 있다면 이 노래가 더욱더 서늘하게 다가온다. 덩그러니 남겨진 말이 사랑이라면 더더욱. 만약 관계의 마지막 장면을 앞두고 있다면 이 노래가 마음 마디마디에 걸리게 될 거다. 도시의 소음을 깔고 걸으며 음미하면 더욱 시리게 느껴지는 곡. 

Track 03. 이소라 – 바람이 분다

가사를 논하려거든 국가대표 이별 장송곡 ‘바람이 분다’를 빼놓을 수 없다. 내 몫으로 남겨진 이별을 끌어안고 이 고된 과정을 치러내는 마음을 과장 하나 없이 빼곡하게 한글로만 채워냈다. 이소라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쓰여서일까, 마이크 앞에서 숨을 고르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이별 앞에 선 우리 같다. 전부였던 당신이라는 거대한 서사가 한순간에 스러질 때, 한 발은 뜨겁게 한 발은 차갑게 서 있는 그대의 손을 이 노래가 잡아주길.


에디터 형규의 추천곡

Track 04. 이현도 – 삐에로

물론 노래나 랩을 하는 퍼포머로서의 이현도가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작곡과 작사, 편곡, 그리고 모든 음악 작업의 콘셉트, 춤을 망라한 최종 결과물을 내놓는 과정에 있어서 이현도의 재능은 가히 천재라 부를 만하다. 그의 솔로 3집 앨범은 ‘완전힙합’이라는 타이틀처럼, 지금의 한국 힙합이 가진 그 모태를 세운 역사적인 명반이다.

이현도는 이 앨범의 타이틀인 ‘삐에로’에서 아주 절묘한 한글 라임을 넣었다. 바로 2nd 벌스에서 펼쳐지는 기역부터 히읗까지의 자음 순서대로 펼쳐지는 가사다. 예컨대 “난 이’겼’어, 부와 명예 모두를 지’녔’어, 어린시절 원하던걸 다 이루게 ‘됐’어” 같은 식이다. 문예창작학과를 나온 그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부분.

Track 05. 노라조 – 변비

‘변비’라는 제목만 보면 ‘또 노라조의 전형적인 저세상 텐션 미친 노래겠거니’ 싶지만, 사실 이 곡은 알만한 사람은 아는 노라조의 감동적인 발라드 넘버 ‘형’의 원곡이다. 제목에서 짐작했겠지만, 방송 심의에 걸려 결국 진지한 가사를 다시 붙인 ‘형’이란 곡이 탄생하게 되어 정작 원곡은 잊혀진 비운의 발라드인 셈.

하지만 변비로 고생하면서 결국 그것을 힘겹게 밀어내는 사람의 심정과, 헤어진 연인을 마음속에서 어렵사리 지워내는 과정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가사가 코믹한 웃음과 절절한 감정을 동시에 건드리며 무릎을 탁 치게 한다. 가사를 음미하다 보면 킹세종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곡.

Track 06. 페니실린 – 남자의 로망

한글의 위엄을 논하는데 왜 외국 밴드가, 그것도 심지어 이시국 밴드라니. 하지만 이 노래는 진짜로 100% 한글로 구성된 가사다. 일본의 비주얼 록 밴드인 페니실린이 2000년대 초, 국내 내한공연을 앞두고 한국 팬들을 위해 자신들의 노래인 ‘남자의 로망’을 한국어 버전으로 급하게 개사해 발표한 곡. 촉박한 시간에도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과학적인 한국어의 위엄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곡이다. 아, 다만 가사 자체는 그다지 음미할 건덕지는 없다. 그놈의 사슴벌레는 왜 그리도 찾아대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을 따름.


에디터 신원의 추천곡

Track 07. 정승환 – 눈사람

‘꽃잎이 번지면 그럼에도 새로운 봄이 오겠죠, 한참이 걸려도 그대 반드시 행복해지세요’. 이 구절은 떠난 사람을 향해 있을까, 아니면 스스로를 되내이며 다독이는 다짐인 걸까. 어찌 됐건 당장 감당하기 어려운 이별을 당한 사람 귀에는 주문처럼 들려온다. 내가 거스른대도 봄은 올 거라고, 한참이 걸려도 행복 비스무리한 것이 찾아오긴 할 거라고. 

격정적인 표현은 쓰지 않았다. 단지 따스한 계절의 한 장면을 빗대어 묘사했을 뿐인데, 정제된 말들 속에서 절절함과 애틋함이 가슴에 스민다. 그리고 참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다. 상대가 행복하길 바라는 쿨한 마음과 그럼에도 완전히 잊히는 일은 거부하는 끈질긴 미련까지. 노랫말은 온통 봄으로 가득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곡의 제목은 눈사람이다. 

Track 08. 곽진언 – 자랑

‘요즘 내가 겁이 많아진 것도, 자꾸만 의기소침해지는 것도 나보다 따듯한 사람을 만나서 기대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곽진언은 이 가사 속에서 자신의 결핍을 상대의 장점과 연결시키면서 사랑스러운 면모로 만들어 버린다. ‘말이 많아진 것도 그러다 금세 우울해 지는’, 이른바 감정기복이 심한 경향 조차도 행복한 사람을 만나서 나의 슬픔을 알기 때문이라고. 전부 남 탓을 하고 있는데 하나도 꼴보기 싫지가 않다. 

결론은 ‘사랑을 나눠줄 만큼 행복한 사람이 되면 그대에게 제일 먼저 자랑하고 싶다’는 것. 마냥 꽁냥꽁냥 달콤한 가사는 오글주의보만 유발하거나 ‘현실은 안 그래’라며 현실주의, 염세주의만 자극할 뿐. 이렇게 서사가 있고 그 속에 섬세한 감정선이 묻어나는 가사는 사랑이 아름답다는 말이 무엇인지 사유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Track 09. 김광석 –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 안에 가득한데’. 침대도 있고 책상도 있고 널부러진 옷가지도 있겠지. 그러나 그의 눈엔 텅 빈 방일 뿐이다. 이렇듯 이별 후에 세상을 잃은 듯한 공허함을 공간감으로 표현하는 게 이 곡의 묘미 중 하나. ‘창 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 보다 커진 내 방 안에’는 또 어떤가. 진짜로 방이 커지진 않았을 테지. 그러나 그녀의 부재가 심적인 착시효과를 유발하고도 남는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안다.

김광석의 가사는 음미하면 할수록 깊은 맛을 우려내고야 만다는 점에서 시와도 일맥상통하는데, 아마 노벨상 심사위원단이 한글을 알았더라면 노벨문학상을 받는 두 번째 가수는 그가 되지 않았을까.